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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춘 인천시장 당선인은 인천 출신이다. 그의 부모는 한국전쟁 때 황해도에서 피난을 왔다. 그의 어머니는 과일 장사를, 아버지는 미8군 항만사령부 군무원으로 일했다. 그들은 인천에서 만나 결혼을 했다.

 박 당선인은 1959년 중구 송월동에서 태어났다. 교육열이 높았던 그의 부모는 송월초에서 박문초로 그를 전학시켰다. 박문초에서의 학교생활은 박 당선인이 신앙생활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됐다. 박문초는 천주교재단 학교다.

▲ 박남춘 당선인의 어린시절 모습.
 동산중 재학시절 그는 쪽방촌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보고 충격을 받아 청소년적십자회(RCY)에 가입해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제물포고 재학 당시에도 RCY 경기도지역 중등부 회장을 맡는 등 봉사활동을 이어갔다. 어린 시절부터 시작한 봉사활동은 박 당선인의 삶을 바꾸는 원동력이 됐다.

 고려대 법대에 입학한 후 사법시험을 준비하는 박 당선인에게 또 다른 삶의 전환점이 찾아왔다. 한 교수가 한 말 때문이다. "미국 같은 선진국들은 법조인이 인정받는 시대에서 행정가들이 주도하는 행정국가로 바뀌었네. 우리나라도 조만간 그렇게 될 것이고 유능한 행정가가 돼 세계를 무대로 역량을 펼치는 것이 어떤가. 굳이 법관이 돼 작은 방에서 한평생을 보낼 것인가"라는 교수의 말을 계기로 박 당선인은 법관을 접고 행정가로 나서게 됐다.

# 공직 좌우명 ‘원칙과 신뢰’

 행정고시에 합격한 후 1981년 수습사무관으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당시 행시 합격생들의 선호 부서인 내무부와 경제 관련 부처가 아닌 비인기 부서로 꼽히는 해운항만청을 지원했다. 인사부서 담당자가 그를 불러 동기생들 부처 배정에 반발하는 것이냐고 화를 냈지만 박 당선인은 "제 소신이다. 제가 태어난 곳은 항구도시 인천으로 인천시장이 아니라면 고향 인천의 바다를 관리하는 해운항만청장이 제 꿈"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그는 1982년부터 바다와 인연을 맺었다.

 그의 공직생활 좌우명은 ‘원칙과 신뢰’다. 그는 논어에 나오는 구절인 ‘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하면 나라가 설 수 없다(民無信不立)’를 가슴에 품고 일했다. 공직자가 국민의 신뢰를 받으려면 진실해야 하고, 진실을 믿고 원칙과 소신에 따라 일을 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 행정고시 동료들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 앞줄 오른쪽이 박남춘 당선인.
 전두환 정권 시절 그는 해양항만청에서 근무했다. 당시 그는 엄청난 경제적 이익을 낳을 수 있는 부산항 관내 공유수면 매립 업무를 담당했는데, 전두환 대통령의 형이 대표를 맡고 있는 업체에 편의를 주라는 압력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박 당선인은 불법을 자행하면서 편의를 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고 해당 기업이 법적 절차를 밟도록 했다. 이후 9개월 만에 불법적인 편의 없이도 문제가 해결됐다. 또 전두환 대통령이 물러난 뒤 5공비리 척결 때에는 전화위복의 계기도 됐다.

 박 당선인은 "대통령의 압력에도 원칙을 지키기 위해 양복 주머니에 항상 사직서를 넣고 다닐 정도였다"며 "아무리 어려워도 반드시 지켜낸 원칙이 결국 더 큰 이익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알기에 지금도 원칙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고 강조했다.

# 정치입문…인간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만남

 국민의 정부 시절 해수부 국장 승진을 코앞에 두고 있던 박 당선인. 그러던 어느 날 당시 노무현 해수부 장관에게서 총무과장을 맡아 달라는 말을 들었다. 박 당선인에게는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지만 노무현 장관의 설득력은 대단했다. 당시 노무현 장관이 온라인상에서 업무처리와 지식 관리를 할 수 있는 시스템 구축을 추진할 사람, 직원들이 직무와 연관된 학습활동을 하도록 함으로써 조직 혁신을 추진할 사람, 회의체계를 토론을 통해 결정하는 회의로 변모하도록 추진할 사람, 공정함과 신뢰를 함께 받을 수 있는 인사시스템을 구축할 사람이 필요한데 그 적임자로 박 당선인이 선택됐다고 말한 것이다.

▲ 박남춘 당선인은 고 노무현 대통령이 임기를 마치고 봉하마을에 내려가 있을 때 자주 들러 옛이야기를 주고받곤 했다.
당선인은 처음으로 ‘혁신’이라는 낯선 단어 앞에 서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서점에서 혁신과 관련된 책을 한 보따리 구입해 공부했다.

 이때 노무현 장관과 맺어진 인연은 이후 대통령과 청와대 국정상황실장, 인사수석까지 이어졌다. 노무현 대통령의 사람 사는 세상의 철학을 공유했고, 이를 실현할 시스템을 배우고 경험했다.

# 국회에서 ‘안정과 민생’에 주력

 박 당선인은 19대 국회의원이 된 후 무엇보다 항상 국민을 먼저 생각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한다. 또 누구보다 많이 인천과 남동구의 내일을 고민했다고도 했다.

 지역구인 인천 남동구는 단순히 정치를 하기 위한 터전이 아니라 가족이 함께 하는 삶의 터전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 도림동 과수원집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여전히 간석동에서 살고 있다.

▲ 대학 졸업식 날.
 그는 남동구 5대 숙원사업을 해결했다. 논현경찰서, 남동우체국, 수인선 터널식 방음벽이 순차적으로 설치될 예정이고 남동산단은 최첨단 리모델링 단지로, 소래포구는 국가어항으로 예비 지정됐다.

 박 당선인은 또 국회에서 국회의원 특권 폐지 등의 성과를 인정받아 300명 국회의원을 대상으로 한 4년 의정종합평가에서 7위, 인천지역 1위라는 평가를 받았다.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데도 최선을 다했다. 크게는 소방안전교부세를 신설해 국가의 안전예산을 확충하는 데 기여했다. 작게는 남동구 골목골목 범죄 예방 CCTV 시스템을 구축했다.

 ‘안전이 곧 민생이다’라는 철학을 바탕으로 안전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국회의원 시절의 정열과 노력, 그리고 성과가 지금의 박남춘 인천시장 당선인을 있게 했다.

  조현경 기자 cho@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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