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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윤식 전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
우리나라가 참가했던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는 두 가지 면에서 관심을 끈다. 하나는 구텐베르크 성서보다 78년이나 앞서 금속활자로 인쇄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고서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이 전시되었다는 사실이고, 또 하나는 실현은 되지 못했으나 애초 파리박람회 한국관(韓國館)이 한국 서민들의 일상생활을 보여주는 제물포의 한 거리를 생생하게 재현하려고 했었다는 사실이다.

이 같은 사실은 박병선(朴炳善)이 쓴 한국근대사료집성(韓國近代史料集成) 4권 한불관계자료(韓佛關係資料) 해제(解題)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앞의 「직지심체요절」에 관해서는 당시 서울 주재 프랑스 공사 콜랭 드 플랑시(Collin de Plancy)가 한국에서 수집해 파리박람회 한국관에 전시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파리박람회 당시에는 이 귀중한 불서(佛書)가 세계 인쇄문화 역사를 뒤바꾼 「직지심체요절」인 줄을 누구도 모른 채 전시됐다가 그 72년 뒤인 1972년 5월 29일 파리 ‘책의 역사 전람회’에서 다시 ‘발견’돼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으로 판명이 난 것이다.

나머지 ‘제물포의 한 거리 재현’ 계획에 대해서도 2001년에 쓴 박병선의 해제에 자세히 나와 있다. "지금까지 한국이 파리박람회에 참가한 사실조차도 별반 소개된 것이 없다.

 한국의 참가는 플랑시 공사 등 프랑스 측의 적극적인 권유에 의해서였다. 한국관에 대한 모든 책임을 맡은 들로 드 글레옹 남작(Baron Delort de Gleon)은 비단, 도자기, 장롱, 의복, 화문석 등 한국의 주요 생산품을 모아 진열해 놓는 것 이외에 노점상, 공방, 술집, 장터 등 한국 서민들의 일상생활을 보여주는 제물포의 한 거리를 생생하게 재현하고자 했었다.

또한 민속놀이, 곡예, 의례 등 축제 한마당을 열고자 했었다. 즉 1900년 파리박람회를 통해서 한국의 고유한 풍습, 민속까지도 고루 프랑스인들과 나아가서 세계인들이 주목할 수 있는 기회를 갖고자 하는 큰 기획을 하고 있었다"라고 밝히고 있다. 이 같은 계획은 당시 한국관 구성을 맡은 글레옹 남작이 파리 만국박람회 개발총국에 보낸 1998년 11월 25일자 의견서에도 나와 있음은 물론이다.

 "이 관은 두 부분으로 구성될 것입니다. 하나는 공식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특이하고 오락적인 것입니다. 공식적인 부분은 정부의 수집품, 근대와 과거 예술품, 그리고 농업, 광산, 산업, 상업, 기타 등등의 모든 생산품을 넣어 놓는 커다란 별장(고종 황제의 여름궁전 형태)으로 구성될 것입니다. <중략>

 이 관의 두 번째 부분은 한국의 활기에 넘치는 골목, 즉 제물포에 있는 길을 구현할 것입니다. 그 길에는 많은 가족들이 거주하며, 진품을 팔고, 몇몇은 자체적으로 그들의 생산품을 제조하는 집들과 건물들이 있습니다. 그 길은 찻집과 노점상, 그리고 야외 곡예사들, 기타 등등 …, 매우 다양하고 매우 이국적인 모습과 옷을 입은 모든 거주자들로 차 있는 활기찬 길입니다.

 한국인의 생활은 여러 행사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제물포 길을 통해서, 다양한 등들과 장식물들을 가지고 매우 빈번하게 열리는 축제를 재현할 것입니다. 이러한 축제들을 위해 특별히 본인은 이 관의 모습을 길 형태로 할 것입니다. 이러한 형태는 제한된 장소를 가지고 가장 잘 조망할 수 있는 효과에 적합한 것입니다."

 전문(全文)에 가깝게 인용했는데, 내용 중에 글레옹 남작이 ‘서울의 어느 한 길’도 아닌 ‘한국의 활기 넘치는 골목’으로 제물포의 길을 점찍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그가 제물포의 어느 길과 어떤 축제를 보고 이렇게 들뜬 듯한 문장으로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던 것인지…. 추측컨대 19세기말, 항도 제물포 서민들의 활력과 부지런함, 쾌활함 같은 것에 그가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이처럼 의욕적으로 한국관 구성을 추진하던 글레옹 남작은 박람회 개최 3개월 전인 1900년 1월에 사망한다. 그리고 그 후임자인 미므렐 백작(Comte de Mimerel)은 글레옹의 민속부문 기획을 철회하고 공공부문만 남김으로써 ‘제물포의 길’은 끝내 실현되지 못한다. 이름 없이 전시되었던 「직지심체요절」이 오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타국 땅에나마 남아 있는 것이 다행이라면, 그 활기찬 제물포의 민속이 어떻든 실현되지 못한 점은 크나큰 아쉬움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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