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섭 문학 박사.jpg
▲ 김형섭 문학박사
세계 경제 10위권 진입을 앞두고 있는 대한민국은 경제 대국의 면모와 달리 OECD에서 발표한 회원국별 독서량의 비교에서 꼴찌다. 그래서인지 정부는 올해를 ‘책의 해’로 선포했다. 국민들에게 독서를 장려하고 출판 수요를 창출하기 위함이다. 이에 따라 다양한 사업들이 진행되는데, 문화도시 남양주를 기대하며 독서에 대한 정약용 선생의 말씀을 전하고자 한다.

1801년 11월 5일(음력), 정약용 선생은 강진으로 유배를 갔다. 강진이 남녘이라지만 겨울 찬바람이 몰아쳤고 유배지 인심은 쌀쌀했다. 큰 학식이 있는 양반임은 모두가 알았지만, 나라에 큰 죄를 짓고 유배 온 정약용 선생에게 온정을 베풀 사람은 없었다. 뜻있는 사람의 주선으로 어렵사리 주막집에서 잠자리와 끼니를 해결할 수 있었다.

지속되는 정적들의 모함으로 유배를 당한 억울함과 원망은 선생의 심신을 병들게 했다. 지난 가을 포항에 유배갔다가 다시 잡혀와 모진 고문을 받았다. 몸은 아프고 어깨는 저려와 붓을 들고 편지 한 통을 온전히 쓸 수도 없었다. 어렵고 힘든 귀양살이 속에서도 자식, 집안 걱정이 많았다. 당시 큰아들 정학연은 18세, 둘째 아들 정학유는 15세였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죄인의 처지에서 힘겹게 붓을 들어 두 아들에게 당부를 적었다.

‘독서하라’ 아버지가 아들에 보낸 첫 번째 당부이다. 조선 시대 양반들에게 독서란 과거시험을 보고 관료로 나아가기 위한 공부를 지칭하거나, 경전(經典)을 연구하는 학자의 길을 걷는 것을 의미한다. 1년 전만 해도 큰 꿈을 안고 공부에 열중이던 아들은, 아버지가 죄인이 되면서 과거를 보고 관료로 진출할 수 없게 되었다. 앞날의 꿈을 상실하고 좌절해 있는 두 아들에게 독서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어린 나이지만 생계를 꾸려야 했고, 아버지의 억울함도 풀어야 했다. 한 때 자신들에게 과거공부에 힘쓰라고 했던 아버지의 편지를 받은 아들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선생은 아버지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우선 자신의 잘못된 독서 경험을 고백했다. "15세부터 서울로 유학했지만 결과적으로 여기저기 떠돌기만 한 꼴이었다. 최고 지성들이 모인다는 성균관에 들어갔지만 모두가 그랬던 것처럼 전형적인 시험 공부에만 매달렸다. 젊은 시절 학문에 몰두했지만 성공을 위한 공부만 했다. 과거시험에 합격해 공직에 나갔지만, 주어진 업무에 매달려 분주하게 지내다가 참다운 공부를 하지 못했다. 이후 비방과 탄핵이 이어졌고, 끝내는 정조 임금의 죽음과 함께 유배까지 오게 됐다. 하루도 온전히 독서에 마음을 쓸 겨를이 없었다"는 반성이었다.

200년이 더 지난 지금도 우리 사회를 돌아보면 거의 모든 공부가 사회적 성공을 목적으로 한다. ‘정약용 선생의 잘못된 공부와 독서’를 아직도 하고 있다. 오히려 더 심해졌고 부작용도 광범위해져 우리 삶이 힘들어지고 청년들의 미래는 어두워 보인다.

선생은 자신의 잘못된 독서 방식을 고백하고, 자신 못지않게 실의에 빠져 있을 아들에게 독서의 효과를 설명했다. 첫째는 ‘효제(孝弟)’를 일깨운다. 인성을 중시하고 학문의 기본 자세를 ‘사람의 가치’를 일깨우는 데 둔 것이다. 둘째 마음을 붙여 살아갈 곳을 찾게 된다. 두 아들처럼 의지할 곳 없고 실의에 빠져 있을 때, 책은 세상과 만나 대화하고 소통하게 한다. 선생은 글과 독서가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두 아들에게 ‘역할’을 주고 미래를 잃은 삶을 이겨냈으면 하는 바람을 담은 것이다. 남양주는 유네스코 평생학습도시다. 정약용 선생은 유배 18년 동안 500여 권의 책을 저술했다. 남양주시 공직자와 시민이 18년 동안 500여 권의 책을 읽고 내면화한다면 한층 성숙하고 살기 좋은 도시로 탈바꿈하지 않을까.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