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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선신 농협대학교 교수
우리 헌법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규정함으로써(제1조 제2항) 국민주권주의(주권재민의 원리)를 천명하고 있다. 국민주권의 행사는 선거를 통해 이뤄지는데, 지난 13일 지방선거와 재·보궐선거에서 우리 국민은 위력적인 ‘주권 의지’를 실현했다. ‘사람 중심 사회’를 지향하는 문재인 정부에 힘을 실어주고자 하는 의지, 한반도의 평화를 갈망하는 의지, 지역주의·색깔론 등에 매달려온 자유한국당에 대한 냉엄한 비판 의지 등이 모여져 거대한 국민적 심판이 이뤄졌다. 향후 2020년에 실시될 제21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입법부도 대폭 개편될 가능성이 점쳐진다.

 그런데, 현행 제도하에서는 사법부만큼은 국민의 주권의지로 바꿀 수 없다. 국민들은 "입법권·행정권과 달리 사법권은 국민이 아니라 ‘사법시험’으로부터 나온다"고 비판한다. 법관은 공부를 잘 했다는 이유로(두터운 법률 서적을 수십 번 읽고 암기해 어려운 사법시험을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는 이유로) 국민의 운명을 좌우할 심판권을 부여받는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 ‘민주적 정당성’을 지닐 수 있는지에 대해 국민들은 심각한 의문을 제기한다. 최소한 법원장 등 고위법관의 보임(補任)에라도 주권의지가 반영되도록 고민해야 한다.

 지난 15일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농단 사건 처리를 놓고 오랜 시간 고민해오던 김명수 대법원장이 고발이나 수사 의뢰를 하지 않고 "수사가 진행될 경우 협조하겠다"고 밝혔다. 그런데, 김 대법원장이 고발·수사의뢰를 하지 않았지만 시민단체 등의 고발을 받은 검찰은 지난 18일 수사에 착수했다.

따라서, 김 대법원장이 (어차피 받을 수사임에도) 고발·수사 의뢰를 하지 않고 떠밀리듯 밝힌 ‘수사 협조 의사’는 사안의 위중함을 애써 외면하는 무책임한 ‘수사(修辭)’이다. "협조 안 하면 어찌할 텐가"라는 차가운 반응도 있다. 물론 법원장 등 다수의 노장 법관들이 형사 조치에 반대하는 상황에서 다른 선택을 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럴지라도, 김 대법원장은 ‘고발’이나 ‘수사 의뢰’를 선택했어야 한다고 본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사법부의 수장으로서 ‘정의 실현’을 위한 적극적이고 당당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수동적으로 "수사에 협조하겠다"는 소극적이고 무성의한 태도를 보인 것은 주권자인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니다. 둘째, 대법원장이 법을 위반하는 태도를 보인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형사소송법은 "공무원은 그 직무를 행함에 있어 범죄가 있다고 사료하는 때에는 고발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는데(제234조 제2항), 이를 위반한 것은 문제이다.

 타인을 심판하려면 먼저 자신(사법부 구성원들)에게 더 엄격해야 하고 솔선수범해서 법을 지켜야 할 것이다. 셋째, 최종심을 담당하는 대법원이 고발·수사 의뢰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말도 타당하지 않으며 변명으로 들린다. 고발·수사 의뢰는 범죄가 의심될 때 하는 것이며, 이를 한다고 해서 반드시 유죄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범죄가 의심되면 당연히 고발·수사의뢰하는 것이 조직 관리책임자의 기본 의무이며, 이를 불이행하면 범죄를 은닉·비호하는 것이고 배임이 되거나 공범이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고발이나 수사 의뢰를 하지 않은 것은 김 대법원장도 역시 ‘조직의 체면과 이익’, ‘제 식구 감싸기’를 ‘국민의 이익’보다 우선시한 그릇된 행태로 비판받을 수 있다.

 김 대법원장의 태도보다 더 충격적인 일은 대법관 13명이 "재판 거래는 없었다"는 입장문을 내는 등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수사 대상이 된 대법관들은 자숙하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임에도 이런 태도를 보인 것은 경솔·몰염치하고도 오만하다고 비쳐진다.

 국민들은 최종심을 담당하는 대법관들의 집단 반발을 보면서, 과연 ‘수사가 제대로 이뤄질 수 있을지’ 그리고 ‘수사와 기소 이후 재판이 공정하게 이뤄질 수 있을지’에 대해 심각한 의심을 갖게 된다. 사법 농단에 대한 세간의 합리적 의혹 제기를 백안시하는 대법관들의 집단 반발은 존경받아야 할 ‘최고 지성’의 태도라고 믿기 어렵고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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