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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채훈 삼국지리더십연구소 소장
6·13 지방선거 당선인들에게 축하와 함께 고언 한마디 해야겠다. 특히 기초단체장에 취임하신 ‘지역 사또’분들에게.

 한평생을 인간 공동체의 자율성에 대해 몸 바친 일리치 선생께서는 "전문가(교육자·의사·변호사·회계사 등등―글쓴이 주)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라 끼워 넣는 것을 우리가 결핍으로 느끼지 않았다면 그들이 인간을 불구로 만드는 막강한 힘을 휘두르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참으로 날카롭다. 전문가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이렇게 통찰하는 걸 두려워한다. 민중이 깨닫는 순간 그들이 이제껏 누려온 권위와 힘의 기반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의 권위와 힘이란 사회나 민중을 대상으로 ‘처방’을 내리는 특권이다. 교육자들은 학생들과 학부모를 상대로 미래에 대처하려면 특정 지식이나 기술이 필요하다고 처방하며, 의사들은 환자나 행정 당국을 대상으로 특정 질병에 대처하려면 특정 약과 조치가 필요하다고 한다. 법률가, 정치인, 사제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수천 년 이어온 민중들의 지혜나 삶의 방식이 ‘초라하고 촌스러운 것’, ‘비문명적인 것’으로 믿도록 강요하면서 자신들이 처방하고 조제한 것들을 마치 ‘멋지고 세련돼 보이는 것’처럼 착각하게 했다. 그동안 우리는 수없이 보아 왔다. 닭이나 오리가 집단 발병을 하면 보건 전문가들의 처방으로 온갖 약을 뿌려대고 대량으로 학살해 땅에 묻었다. 이명박 시절 ‘4대강 살리기’라는 사업의 이면에는 토목·하천관리·환경 전문가들의 이속과 영혼 없는 논리가 있었다. 각종 위원회나 컨설팅 등에서 자본과 권력을 위한 봉사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행정편의주의에 기생하는 전문가들의 수효는 오늘의 각급 행정기관에 차고 넘친다.

 교육자들이 철학 없는 인적 자원의 상품화를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돈, 그리고 인간다운 삶을 희생시켰는지를 오늘의 교육 현장이 생생하게 보여 준다. ‘병원이 병을 낳는다’는 얘기처럼 전문가의 필요는 또 다른 전문가의 필요를 낳는다. 그 가운데 평범한 사람들은 결핍과 열등에 빠지고 이를 해소하는 비용은 급증하기 마련이다. 물론 겸손하고 실력 있고 양심적인 전문가도 많으나 그들은 행정 당국에서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노동 해방을 위해 진력하는 분들, 올바른 인간을 키우려는 교육자, 힘없는 민중들을 위해 애쓰는 법률가들은 철학 있는 전문성 때문에 별로 대접받지 못 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 아닌가.

 인구 30만 명이 사는 미국 캘리포니아 스톡턴의 시장 마이클 텁스는 2019년부터 미국의 도시로는 처음으로 대규모 기본소득 지급 실험을 하겠다고 발표했다. 연간 소득 2만6천 달러 이하의 시민 100명을 무작위로 뽑아 1년 반 동안 매달 500달러씩 지급하겠다는 내용이다. 물론 전문가들의 반대와 비판이 폭주했다. ‘일하지 않는 사람들을 게으르게 만들 뿐이다’, ‘노동의 가치를 무시하는 정책이다’, ‘처음에는 90만 달러 정도라고 얕잡아보겠으나 그것이 계속되면 엄청난 재정 압박이 될 것이다’ 등등. 스톡턴은 6년 전 파산을 선언한 도시다. 요트장을 새로 건설하는 등 전임 시장의 지역개발, 경제 활성화, 관광산업 육성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 아래 과다 지출한 결과였다. 건설이니 개발이니 하는 데 투자하고 사람에게 투자하지 않는 후유증은 범죄율이 치솟고 훌륭한 이웃들을 다른 도시로 쫓아냈다.

 텁스 시장은 기존의 정책 패러다임으로 이 도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 전혀 새로운 정책을 도입하고자 했다. 하지만 전례가 없는 정책으로 전면 시행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제한적으로 이런 발표를 내놓았다. 당선인들이 할 일이 많다. 그 가운데 중요한 것은 이제껏 전문가들이 만들어놓은 잘못된 관행이나 제도, 그들의 처방을 일단 제쳐두고 실험하는 일만은 빼놓아서는 안 된다. 서울의 모 구청장 당선인은 인수위원회를 출범시키면서 전문가 중심의 구정 운영을 준비하고 있다면서 기자들에게 큰소리쳤다. 아마 대다수 당선인이 그와 비슷할 것이다. 인수위는 행정·도시 관리·복지환경·안전·건설·기획경제 등 주요 현안을 보고받고 당선인의 공약을 구체적으로 실현할 로드맵을 내놓겠지. 주민을 소비자로, 유권자로 수치화하면서. 그렇게 하지 않으시기를 빈다. 중독 시스템은 깨져야 한다.

  ▣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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