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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환 정경부장
"아버님, 살려주옵소서." 죽음의 냄새가 물씬거리는 뒤주의 귀퉁이를 부여잡고 갇히기를 거부하는 사도세자의 처절한 절규였다. 왕과 세자 군신 끈으로는 죽음의 엄습을 피할 길이 없기에 부정(父情)에 매달린 자식의 마지막 애소(哀訴)였다. "노비의 세금을 반으로 감하라" 했던 애민의 군주 영조는 피붙이의 정을 모질게 끊고 야합의 권력을 좇았다. 나이 마흔둘에 얻은 아들을 옅은 조각 빛조차 스미지 않는 좁은 뒤주에 가뒀다. 스물일곱의 아들은 아비의 불호령에 물 한 모금 들이키지 못했다. 초여름의 더위와 굶주림에 신음하기를 여드레, 사도세자는 그렇게 생죽음했다.

 조선왕실 500년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이 사건은 두루 통하고 편벽되지 않는 군자의 공심, ‘탕탕평평(蕩蕩平平)’의 제물이었다. 탕평의 실천적 규범은 무엇인가. 당파와 계파, 신분을 뛰어넘는 고른 인재(人才) 등용이 아니던가. 두말할 나위 없이 국론 앞에 당론이 있을 수 없는 소통과 협치(協治)다. 이런 탕평이 어찌 국왕을 대신해 대리청정하던 제2의 권력자, 그것도 불변의 차기 군주를 사지로 내몰 수 있었다는 말인가.

 가면으로 가린 탕평의 본 모습이 탕평답지 않았던 말미암음이었다. 편벽해 두루 통하지 않은 소인의 마음이 가득했던 연유였다. 특정 가문과 문벌의 출셋길을 열고 득세를 노리며 집권을 겨냥하는 방편으로 탕평을 삼았다. 탕평의 이름으로 탕평을 거슬렀던 것이다.

 이런 반(反) 탕평이 횡행했던 까닭은 무엇인가. 현세의 권력으로 과거의 욕된 역사를 정당화로 조제하려 했던 오만과 독선이었다. 영조의 이복 형 경종 때였다. 연잉군(훗날 영조)과 여당인 노론은 은밀히 ‘택군(擇君)’을 도모했다. 그것도 ‘왕세자(王世子)’가 아닌 ‘왕세제(王世弟)’였다. 연잉군을 군주의 자리에 앉힌다는 정권 전복의 모략이었다. 신하가 임금을 가리는 택군은 분명 역모이자 반역이었다. 더구나 경종 독살설에 힘이 실리는 마당이었다. 병치레를 하던 경종에게 의관들도 극구 반대한 ‘상극’ 게장과 생감을 수라상에 연신 올린 것이었다. 경종이 지지했던 소수 야당 소론 강경파는 꼬투리를 잡아 반전에 성공했다. 노론 영수들을 역모로 다스리고 연잉군을 반란의 수괴로 깎아내렸다. 우여곡절 속 소론 온건파의 동조로 연잉군은 즉위했다. 하지만 그 정당성에는 깊은 상처가 새겨 있었다.

 영조는 과거에 집착했다. 형을 해하고 임금에 오른 동생이라는 콤플렉스였다. 집권의 정당성과 자기변명은 집요해 신물 날 정도였다. 그를 군주로 추켜세우다가 피를 흘리며 죽어간 노론 영수들의 신원(伸寃)이 그 노정(路程)의 첫걸음이었다. 노론 영수들의 반역죄를 사하고 박탈한 직위를 회복시키며 노론의 문하에 벼슬을 줬다. 그러면서 ‘탕평’이라는 이름을 내걸었다. 영조의 탕평은 역모로 멸문지화를 당한 과거의 패자에서 솟을대문으로 서울(한양)을 메운 승자, 노론의 역사였다.

 기울어진 탕평은 깊었고, 정쟁과 당쟁의 불꽃은 맹렬했다. 권력을 향한 노론의 탐욕은 거침없었다. 외척과 결탁해 권력을 독점해 나갔다. 세자의 생모는 남편(영조)에게 자식을 내칠 것을 간언했다. 세자의 아내는 노론의 최고봉인 안국동(安國洞) 친정의 세도를 넓히느라 소론을 두둔한 남편을 정신병자로 몰아 황천길에 세웠다. ‘망국동(亡國洞)에는 망정승(亡政丞)이 산다’는 여염의 비난이 들끓었다. 노론의 기승에 괄시받던 소론 강경파도 반격에 나섰다. 이인좌의 난과 나주벽서 사건 등 영조 정권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또 다른 역모를 감행했다. 탕평으로 덧씌운 피의 역사는 대상과 시기를 달리 했을 뿐 계속됐다.

 민선 7기 인천시 정부가 돛을 올렸다. 협치를 강조하고, 블라인드 채용을 통한 공정인사를 주창했다. 이는 과거에 얽매여서 안 되는 일이다. 그 눈은 바로 지금에 고정시켜야 하고, 그 시선은 내일을 응시해야 한다. 오늘과 내일이 어제와 같은 무게일 수 없다. 과거의 족쇄에 사로잡힌 탕평은 비극의 시작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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