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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북부의 1천 년 경기 역사

유호명 경동대학교 홍보센터장

기호일보 webmaster@kihoilbo.co.kr 2018년 07월 06일 금요일 제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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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호명 경동대학교 홍보센터장
최근의 평화 무드와 6·13 지방선거 당선인들 공약 등으로 하여 경기도 분도에 대한 북부지역 주민들의 기대가 커지고 있다.

 통일경제특구와 평화통일특별도 같은 명칭이 구체적으로 언급되기도 하니, 어떤 방식으로든 논의가 본격 진행될 것 같다.

 명칭에서 통일과 평화, 그리고 오랜 군사적 규제에 대한 보상 성격의 경제 진흥을 염두에 두었음도 감지되며, 분도의 취지와 지정적 특수성, 중앙정부 지원 등에 대한 논의는 전문가에게 맡기고, 나는 분도를 상정한 경기북부 광역단체 명칭을 생각해 본다.

 경기( 京畿 )의 畿는 주나라 때 왕성 주변 500리 이내를 이르던 말이다 .

 그러므로 경기는 본래 왕성과 그 주변을 아울러 가리켰는데, 현재는 서울을 뺀 주변 지역만을 이르는 고유명사가 됐으나 한편 생각하면 ‘경기’의 영역이 고려와 조선에 있어 서로 다르니, 그렇다면 고유명사라 하기도 조금 무엇하다.

 아무튼 경기 내지 경기도라는 중국 말은 고려시대에 도입됐으나 고려 현종 9년 (995) 개경(개성 ) 주변 13개 현을 경현 (京縣)과 기현(畿縣 )으로 삼은 것이 오늘날 경기도의 시초이다.

 이후의 조선이 화이사상을 존숭한 유교문화로 하여 한반도라는 우리에 갇혔지만, 반대로 고려는 분방한 진취적 국가였다.

 이러한 국가 성향과 목적을 감안할 때 경기라는 지명은 매우 특별하다. 경상(경주+상주), 전라(전주+나주)와는 달리, 어떤 품격과 지위와 나아가 일정 왕성 보위의 결기까지 담은 듯하다.

 고려 현종 때의 초기 경기에는 오늘날 개성시와 황해도 금천, 경기도 개풍, 장단, 파주에 연천 일부가 포함됐다. 문종 23년(1069) 52개 현으로 경기를 확장하는데, 북으로는 황해도 곡산과 수안, 남으로는 화성과 시흥, 과천까지로 넓어졌다. 또 남쪽의 수원, 평택, 안성도 빠졌으며, 조선 건국 후 도읍을 개경에서 한경으로 옮기자 경기도는 오늘날의 서울을 중심에 두고 현재와 비슷하게 조정됐다.

 그러나 1천 년 넘는 역사의 ‘경기’는 그 계승을 서로 다툴 만큼 여전히 매력적이다. 경기북부의 지정적 의미를 짚어보자. 연천 임진강에 항구 고랑포가 있었다. 개성과 한양에 수로와 육로가 연결되는 큰 상권으로, 일제강점기 인구가 3 만 명이었다.

 그때 20만 명이던 서울 강북 인구가 지금 480만 명이니까, 조금 억지스레 환산하면 70만이 살았다는 말이 되겠다. 이 말은 또 한국전쟁으로 인한 파주, 연천, 철원의 주민 소개가 아직도 풀리지 않았음과 그로 인한 지역 발전의 장애 정도를 극명히 드러낸다. 지금 북쪽으로 꽉 막힌 느낌을 주는, 그러나 너른 들판인 양주 백석과 광적, 은현은 임진강과 서해와 북한을 향해 활짝 열릴 21세기의 새 지평이다.

 오늘의 경기도 북부가 남부에 비해 낙후된 이유는, 위로는 휴전선에 의해 막다르고 아래로는 서울이 모든 것을 쓸어 담는 탓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향후 발전 가능성과 역동성은 오히려 경기북부에 있다. 군사적 위협이 제거되고 남북의 육로와 해운이 열리면, 사람도 물자도 쏟아져 들어올 것이다. 이를 고려한 자원 분배와 정책 결정은 정부의 몫으로 두고, 분도에 즈음한 ‘경기도’ 지명을 다시 생각하자. 미개발 지역의 위치나 향후 발전 가능성, 통일 한국의 남북 접점과 지형적 중심, 1 천 년 경기 역사의 정통성, 경기도의 서해 진출로 등을 고려하면 ‘京畿’라는 말의 연고권은 역시 경기북부에 있는 것 같다.

 간단히 말해 본래의 경기는 한수이북(漢水以北)에 국한된 지칭으로 개인적 생각에는 분할 후 경기남부가 ‘경기’라는 말을 쓰더라도 이는 경기북부를 ‘경기도’로 하는 바탕 위에서라야 타당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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