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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락기 시조시인
어언 올 장마는 어디로 가고 본격 무더위가 시작됐다. 요즘 지자체마다 천변이 잘 정비돼 냇물에는 물고기와 새들이 한가로이 공생한다. 그들과 합류하면서 천변길을 오갈 때 양쪽 둑에는 온통 하얗거나 노오란 꽃들이 몸을 흔들면서 반긴다. 개망초와 금계국이다. 애기똥풀과 원추리도 더러 보인다. 순간순간 더위를 잊게 하는 7월의 꽃들이다. 그런데 천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없는 여름 꽃 가운데 ‘치자꽃(梔子花)’이 있다.

 예로부터 뭇사람들이 상찬한 꽃. 송나라 증단백은 열 가지의 꽃을 벗에 비유해 ‘명화십우’를 지을 때, 치자꽃을 선우(禪友)라 했다. 참선하듯 맑은 친구란다.

 조선시대 예술로 행락을 삼던 안평대군은 치자꽃을 옥잠화, 목련화와 함께 ‘청초한 꽃’이라 했다. 이처럼 시인묵객들이 ‘청향(淸香)’을 치자꽃의 특징으로 삼았다고 한다. 저 80여 년 전 민족사학자 문일평은 치자꽃 향기가 아주 강렬하다면서 그의 「화하만필」에서 그리 말했다.

 치자가 유명한 꽃은 꽃인가 보다. 이즈음에도 대중가요나 시로 불려진다. 청마 유치환은 치자꽃을 연인 이영도에 비유해 읊었다고 전한다. 여기서 여행작가 서숙지의 시를 주목한다. "길어야 사나흘 향기마저 서럽거늘/ 치자꽃 속에는 어머니가 계신다." 모성이다.

 나는 지금 이 순간 발코니 화분에서 낙화한 치자꽃을 주워 마주하면서 글을 쓴다. 초록 꽃대궁에 노랗게 이운 꽃. 10여 년 전 돌아가신 장모님이 생전에 기르다 물려주신 치자 고목이 죽은 후, 아내가 두 번째로 들여온 것이다. 누구든 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말로 다할 수 없다. 5월 말에 첫 꽃을 피우고 말기에, 해가 잘 드는 쪽으로 옮겼더니 이 달에 다시 서너 송이의 유백색 꽃을 피웠다.

 치자꽃을 볼 때마다 은은히 웃으시던 장모님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는 살아생전 정갈했으며, 돌아가시기 며칠 전 가족모임에서 이 못난 사위가 따르는 약주까지 받으셨다. 평소에 술을 전혀 들지 않으시던 가톨릭 신자였다. 넉넉잖은 가운데서도 늘 담담한 자세로 뭐든 주려고만 하시던 모습, 내리사랑이다. 영결식 날, 이미 오래전 별세하신 장인어른 산소를 개장해 나란히 화장하고 함께 천주교 봉안당으로 모셨다. 그날 두 분 사이에는 이저승의 극적인 만남이 있었다. 하늘이 무척 고운 날, ‘동행길’이라는 시조를 지어 발표한 바 있다. 세월이 지날수록 장모님의 자취는 그의 자긍심으로 남아 점점 더 곁에 살아난다. 흔히 치자 꽃말은 청결, 행복, 순결, 즐거움이라 하는데, 여기에 ‘내리사랑’과 ‘자긍심’을 더하면 좋겠다. 정갈한 꽃송이의 은은한 내음은 내리사랑 같고, 사철 푸른 잎은 자긍심으로 반짝이는 것 같다.

 작금 나라 상황을 본다. 대통령이 정상외교차 인도와 싱가포르를 다녀오는 동안 전국편의점협회 회원들은 최저임금 문제로 날 잡아가라며 성명을 냈다. 집권 2년차에 들어선 정부 건만 나라 안은 편치 않다. 이른바 보수야당은 콩가루 집안 같다.

 대통령이 올 4월 남북 정상회담 이후 미국·일본·러시아 정상과는 통화했지만, 중국 시진핑 주석과는 그가 지방에 머문다는 이유로 며칠째 통화를 못했던 소식이나, 작년 12월 중국 방문 중에 수행기자가 폭행당했을 때의 무기력한 모습은 쉬이 잊히지 않는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자긍심이 무너졌다. 이러한 일들이 앞으로 대한민국이 평화통일로 가는 과정에 겪는 진통의 하나라면 다행이겠다.

 얼마 전 영국의 BBC방송은 미국, 태국, 알제리 등 세계 곳곳에 한국어 배우기 열풍이 분다고 보도했단다. 미국의 경우 20년 전 163명이던 한국어 수강생이 1만4천 명으로 늘어난 것으로 추산된단다. 시조의 세계화를 지향하고 있는 이때 고무적인 일이다. 그만큼 한국의 대표 정형시이며 한글로 된 우리 시조 대하기가 쉬워질 수 있다.

 한민족 문화 자긍심의 표상인 시조가 처한 상황은 치자꽃과 다를 바 없다. 은은하고 맑은 향기가 강렬하게 퍼져나가듯 시조도 온 누리로 퍼지기를 고대한다. 그 시조 한 수로 맺는다.


 <치자꽃 향기>
 
 유백색 맑은 향에 젖 내음이 묻어난다
 
 올해 다시 피었으매 그 그리움 어이할까
 
 통째로
 다 주는 사랑
 장모님의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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