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올림픽이 열린 해다. 지금도 서울종합운동장에서 호돌이가 상모를 돌리는 모습이 생생하다. 당시 인천에서도 숭의운동장을 중심으로 체육활동이 활발했다.

이곳을 채웠던 많은 선수들의 거친 숨소리는 이제 시민축구단 ‘인천 유나이티드’ 경기에 힘을 불어넣는 팬들의 응원소리로 바뀌었다.

 ‘인천 레슬링 스타’ 장창선(75)씨를 배출했던 숭의운동장의 작은 구장은 2018 러시아 월드컵 국가대표 문선민(26·인천 유나이티드)이 뛰는 인천축구전용경기장으로 거듭났다. ‘인천체육 성지’, 숭의운동장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볼까 한다. <편집자 주>

# 인천체육의 성지, 숭의운동장 탄생

 "못 먹고 배를 곪아가면서 하던 운동으로 밥 먹고 사는 시대가 왔으니 이 얼마나 좋은 시절인가!"

 까마득한 옛날 이렇다 할 도구 하나 없이 운동하던 시절, 멋모르고 시작한 운동이 끼니를 해결하는 수단이 돼 버려 평생 운동만 했던 인천체육인들은 아직도 옛 기억에 잠기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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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9년 열린 전국체전
인천체육은 근대체육의 최초 발원지라고 한다. 구한말 열강들이 군함을 타고 수도와 가장 가까운 항구도시인 인천에 도착했다. 경인철도를 통해 여러 지역으로 생산적 활동과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이 활동들 속에 근대스포츠도 포함돼 있었다. 인천의 근대스포츠는 학교와 기독교단체, 운동회, 애국계몽단체, 청소년단체, 체육단체 등을 통해 보급되거나 계몽됐다. 그래서 근대 이후의 우리나라 체육역사의 최초 시작 지역은 ‘인천’인 것이다.

 인천의 운동장 역시 구한말 이후 일제강점기였던 1920~1935년 웃터골 공설운동장(현 제물포고), 1923~1945년 월미도 공설운동장, 1936~1945년 도산정(현 도원동 지명) 공설운동장 등을 중심으로 이어져 왔다. 이들 공설운동장이 일제의 탄압으로 전쟁용으로 사용되면서 그 기능은 상실됐다. 광복 후 보수 작업으로 서서히 숭의동 시대가 열린다. 1964년 9월 ‘제45회 전국체육대회’ 개최를 위해 도산정 공설운동장을 대폭 확대하면서 종합경기장 규모로 재탄생한다. 바로 ‘숭의종합경기장(이하 숭의운동장)’이다.

 숭의운동장은 육상과 연식정구, 야구, 소구장(실내경기) 등을 갖춘 인천체육인들의 성지로 거듭났다. 1975년에는 ‘도원실내체육관’이 건립되면서 기존 소구장에서 했던 핸드볼·농구·배구·유도·레슬링·복싱 등을, 1978년에는 도원실내수영장 건립과 함께 사격장·궁도장·양궁장·승마장 증설로 명실상부 인천을 넘어 전국 최대 종합경기장으로 손꼽혔다. 이를 바탕으로 숭의운동장에서는 총 4회의 전국체전이 열리기도 했다.

# 전국체전 4회에 빛나는 숭의운동장

 1961년부터 1980년까지 인천체육 역시 한층 단단해지는 시기였다. 이때 출범한 제3공화국은 위축된 정통성과 국민적 공감대를 이끌어 내기 위해 체육활동을 크게 장려해 전국체전을 크게 활성화시킨다. 인천은 이런 정부 시책에 빠르게 부응하며 경기도 소속으로 1964년과 1978년에 각각 제45회와 제59회 전국체전을 개최했다. 1981년부터 2000년까지 인천체육은 급격히 성장한다. 서울에서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 개최로 국가 위상이 크게 높아지던 시기이다. 인천도 ‘경기도 속의 작은 도시 인천’이 아닌 ‘인천직할시(1981년 7월 1일)’로 승격되면서 독자적 성장을 하게 됐다. 이때 체육회도 경기도체육회에서 ‘인천직할시체육회’로 독립했다. 1983년 10월 6일부터 11일까지 인천에서 개항 100주년 기념으로 ‘제64회 전국체육대회’를 단독 개최해 인천체육이 한 단계 올라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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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3년 인천 단독 첫 전국체전
 인천은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사용 목적으로 문학월드컵경기장(2001년 완공, 종합경기장)을 짓고 있었는데, 문학월드컵경기장 완공 기념으로 1999년 제80회 전국체전을 유치했다. 그러나 문학월드컵경기장 완공이 늦어지면서 전국체전을 숭의운동장에서 개최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인천은 숭의운동장 총 4회(경기도 2회, 직할시 1회, 광역시 1회), 아시안게임 기념 1회(2013년 제94회) 등 총 5회의 전국체전 개최도시가 됐다.

 옛날 인천에서 운동했던 체육인이나 체육 관계자들에게 숭의운동장의 추억을 이야기해 달라고 하면 무궁무진하다. 1964년 제45회 전국체전은 당시 제18회 도쿄 올림픽으로 평소보다 한 달가량 빨리 시작했다. 그로 인해 대회기간 내내 여름 폭우로 대회 운영에 문제가 많았다. 경기장의 배수시설 또한 미흡해 선수들은 진흙탕 속에서 경기를 치렀다. 대회 마지막 날 예정됐던 야구·핸드볼·연식정구 등은 폭우로 경기를 하지 못해 공동 우승으로 처리하는 등 기억에 남는 일들이 많았다.

 1960년대는 세계적으로 동계 스포츠가 활발히 보급되는 시기였다. 하지만 인천은 이렇다 할 동계 종목을 운영할 장소가 마땅치 않았다. 그 대안으로 또다시 숭의운동장이 등장한다. 지금은 지구온난화로 겨울철 실외에 얼음이 잘 얼지 않지만, 당시만 해도 얼마나 추웠던지 숭의운동장에 물을 얼려 스케이팅·피겨스케이팅 경기를 했다. 경기가 없는 날에는 일반 시민들에게 개방해 추억거리를 선사하는 등 대중적 사랑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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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대 스케이트장 모습.
1999년 제80회 전국체전 당시 숭의운동장의 각 경기장 시설이 노후화돼 인천체육인들에게 많은 고민을 안겼다. 그런 찰나 인천에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2002 한일 월드컵’이었다. 전국적으로 한일 월드컵 개최에 따른 각 경기장 건설이 있었고, 인천은 문학월드컵경기장 건설이 결정됐다. 축구전용경기장이 아닌 종합경기장으로 짓기로 했다. 문학월드컵경기장 완공 기념으로 유치했던 제80회 전국체전은 문학월드컵경기장 완공 지연으로 숭의운동장에서의 마지막 전국체전으로 치러지게 됐다. 이렇게 인천시민들의 많은 추억과 역사적 의미를 간직한 숭의운동장 시대는 2002년 한일 월드컵 이후 각종 대규모 종합경기대회가 문학경기장에서 열리며 서서히 막을 내린다. ‘숭의시대’에서 ‘문학시대’로의 이전이다.

# 그 찬란했던 명(命)이 다하는 숭의운동장

 인천체육역사의 중심으로 수많은 전국대회와 프로스포츠의 홈구장으로 사용되며 영광의 날들을 함께 했던 숭의운동장은 문학경기장에 영광을 넘겨주며 생을 마감한다. 2008년 6월 숭의운동장이 사리진 자리에서는 숭의지구 재생사업이 진행된다. 하지만 사업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대형 마트 문제를 두고 시공사와 미추홀구청 간 갈등으로 공사가 중단되는 등 내홍을 겪기도 했다. 결국 사업이 재추진되면서 2012년 인천축구전용경기장으로 새롭게 탄생한다. 인천축구전용경기장은 시민구단인 프로축구 인천 유나이티드의 홈 구장으로 사용되면서 인천시민들의 발길을 재촉하고 있다.

# 축구 성지로 탈바꿈한 숭의 터

 인천 유나이티드의 숙원이었던 인천축구전용경기장이 2012년 모습을 드러냈다. 숭의운동장의 숭고한 역사를 등에 업고 탄생한 인천축구전용경기장은 기존 경기장이 갖고 있던 패러다임을 깨고 한국 최초 또는 최고 수준의 시설을 갖춘 축구전용경기장으로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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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축구전용경기장 전경.
 6만2천200㎡의 터에 2만여 석, 지하 3층·지상 4층 규모로 건립된 인천축구전용경기장은 FIFA(국제축구연맹) 규격에 따라 국제적 수준의 축구장으로 설계됐다. 인천의 도약을 상징하는 역동적이고 유연한 유람선의 이미지를 형상화했다. 무엇보다 축구전용구장이란 품위에 걸맞게 쾌적한 축구 관람환경을 제공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각을 최소화하고 22도의 시야각을 확보했으며, 관중석 규모는 2만여 석으로 K리그에서는 최초로 관중석에 구단 풀네임을 새겨 넣었다. 기존 국내 경기장에는 팀 별칭이나 도시 이름이 쓰여 있던 것이 전부였고, 이는 유럽 클럽 부럽지 않은 장소가 됐다.

 기존 신규 경기장과 달리 도심 한복판에 위치해 접근성 또한 뛰어나다. 4개 방향 모두 도로로 이뤄져 차량 출입구 역시 4면으로 배치돼 교통 흐름이 원활하다. 대중교통을 이용해서도 쉽게 경기장에 들어설 수 있다. 북쪽 광장이 경인전철 도원역과 연결돼 있는데다 우천 시에도 비 한 방울 맞지 않고 입장할 수 있을 만큼 모든 통로를 연결했다. 주차공간 역시 스위스의 베른과 바젤 경기장 등 유럽 최첨단 경기장을 벤치마킹해 혁신적이다. 한국 최초로 경기장에 지하주차장을 설치해 총 3개 층 규모로 2천 대가량이 동시 주차가 가능할 만큼 관중 편의를 극대화했다.

 무엇보다 국내 경기장과 가장 차별화한 점은 그라운드와 관중석 간 거리다. 최대 1m 안쪽으로 좁히는 등 유럽 리그에서나 볼 수 있는 골 세리머니 하는 선수 바로 뒤에 관중이 환호하는 장면이 인천축구전용경기장에서 연출되고 있다. 응원석 역시 인천구단 서포터스의 의견을 적극 수렴해 복층을 단층으로 전환함은 물론 스탠딩석도 함께 설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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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Utd 선수들이 경기에 출전하고 있다.
 인천축구전용경기장 북측 2층 스탠드에는 잔디가 깔린 피크닉석과 유소년 풋살구장이 설치돼 있다. 이곳은 다양한 이벤트 행사, 다목적 문화공간 장소 등으로 매 홈경기 때마다 활용되고 있다. 경기장 남쪽에는 대형 마트가 입점해 시민과 관중 모두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

 축구팬들과 시민들이 축구를 보다 편안하고 즐겁게 볼 수 있는 최상의 조건을 갖춘 인천축구전용경기장은 ‘인천체육의 성지’로서 빛을 발하고 있다. 하지만 인천체육인들은 숭의운동장이 허물어진 날부터 지금까지 가슴속에 품고 있는 작은 바람이 있다.

# 풀어야 할 숙제, 인천체육인의 바람 ‘인천시체육회관’

 인천시체육회에서 35년간 근무하고 지난해 말 정년퇴임한 박형수(60)전 체육시설운영부장이 지금도 못내 아쉬워하는 것이 있다. 숭의운동장 터에 인천체육인들의 쉼터였던 ‘인천시체육회관’이 허물어진 후 인천체육인들이 여지껏 떠돌이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제64회 인천 전국체전이 열렸던 1983년 20대 중반의 나이에 전국체전 준비요원으로 시체육회에 입사한 박 전 부장은 전국체전 3회, 인천아시안게임 1회 등 인천에서 열렸던 대규모 스포츠 이벤트를 모두 손수 치른 인천체육의 산 증인이다.

 1993년 인천체육에도 독자적인 건물이 필요하다는 체육계 인사들의 의견이 관철되면서 인천시체육회관이 건립된다. 숭의운동장 공터에 건립된 인천체육회관은 체육회 사무실과 가맹경기단체 사무실, 5개 종목 훈련장과 선수 합숙소, 식당 등 다양한 시설들을 갖춘 체육시설로 10여 년 동안 체육인들과 선수들에게 쉼터가 됐다. 체육회관 역시 숭의운동장이 붕괴되면서 없어졌고, 그때부터 체육회 직원은 물론 선수, 각 가맹경기단체 관계자들이 여기저기 건물로 이사하면서 떠돌이 신세가 됐다.

 박 전 부장은 "숭의운동장을 허물 때 시에서 체육회관을 지어주겠다는 약속까지 했는데, 지금도 시체육회는 문학경기장 서측을 사실상 임대로 사용하며 눈치를 보고 있는 실정이다"라며 "하루빨리 인천체육인들의 숙원인 체육회관이 건립되길 손꼽아 기다려 본다"며 작은 바람을 전했다.

  최유탁 기자 cyt@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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