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공항서비스평가(ASQ) 12년 연속 1위를 해 온 인천국제공항이 올해 1월 18일 제2여객터미널(T2)을 개장했다. T2에는 청소·안내로봇, 비접촉 지문인식 등 4차 산업혁명의 총아(寵兒)인 최첨단 기술(ICT) 등을 갖췄다. 지금도 인천공항은 연간 1억 명 이상 여객처리능력을 갖추기 위해 4단계 건설사업에 들어갔다. 쉼 없이 도약을 준비하는 인천공항의 30년 역사를 들여다본다. <편집자 주>

# ‘국제공항’이 절실했다

6-2.jpg
▲ 1992년 개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위성에서 찍은 모습. 지금의 인천공항 부지가 바닷물로 채워져있다.
정확히 30년 전 1988년에 서울 올림픽이 대한민국에서 열렸다. 이때 한국 정부는 본격적인 국제화 시대의 주도국으로 확장해 나가기 위한 준비를 한다. 세계를 향한 ‘국제공항’ 건설 필요성이 대두됐다. 여기에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 시행과 김포공항 국제선의 ‘여객 수용능력 한계’ 등도 한몫했다. 정부는 신공항 건설 입지 선정을 위한 타당성을 조사하고 국제 수준의 공항 건설에 첫발을 내딛는다.

# 영종도, 신공항 후보지로 선정되다

 1987년 김포공항 제2활주로가 개통됐다. 하지만 여전히 국제선은 포화상태였다. ‘항공 소음’ 등으로 김포공항 인근 주민들의 불만도 거셌다. 주민들은 김포공항 진입도로를 점거하는 등 반발이 강했다. 정부는 김포공항 인근 주민들을 위한 소음대책을 마련하는 동시에 소음피해 없는 신공항 건설 입지 선정을 서둘렀다.

 

6.jpg
▲ 신공항 건설본부 관계자가 영종도 내 토지, 어업권보상 문제로 지역주민을 만나 설득하고 있는 모습.
1989년 국내 공항 분야 전문 용역사와 해외 컨설팅 업체에 의뢰해 최종 입지 선정을 위한 작업에 나섰다. 경기도 시화지역과 인천 영종도가 후보지로 꼽혔다. 교통과 환경, 발전 가능성 등 종합적인 검토 결과, 영종도가 최종 후보지로 선정됐다.

# 천혜의 조건을 갖춘 영종도에 본격적인 신공항 건설사업 추진되다

 영종도는 서울 도심에서 육로로 약 52㎞ 서쪽에 위치한 곳이다. 1989년 경기도 옹진군에서 인천직할시(현 인천광역시) 중구 운서동으로 편입된 지역이다. 공항 건설부지는 영종도와 용유도 사이의 간석지(5㎞)와 일부 육지를 포함해 약 5천619만9천㎡에 달했다. 간석지는 평균 수심이 1m 정도로 주변 국제공항보다 매립비용이 낮게 측정됐고, 김포공항·수도권과의 인접성과 공역제한 상황 양호, 토석 채취 가능한 야산 등 최적의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 인천국제공항의 명칭, 인천시민들의 힘으로 탄생시키다

 세계 각국의 공항 명칭은 공항에 인접한 도시명으로 표시하거나 도시의 유명한 사람 이름을 사용하기도 한다. 1992년 신공항건설본부는 전 국민을 대상으로 새 공항(인천공항) 이름을 현상 공모했다. 그 결과 ‘세종공항’이 1위를 차지했다. 서울과 새서울, 아리랑 등이 뒤를 이었다. 인천의 지역성을 나타내는 영종, 인천 등은 6위와 8위에 그쳤다. 하지만 21세기를 준비하기 위해 설립된 ‘새천년준비위원회’에서 ‘인천 밀레니엄 국제공항’을 쓰자는 의견을 제시한다.

 

6-1.jpg
▲ 공항건설 전 영종도
결국 1993년 5월 국토해양부는 청와대와 인천시의회, 문화부, 언론사 등의 의견을 수렴해 당선작 없이 세종공항, 서울-영종공항, 인천공항 등 가작 3편만을 발표했다. 1996년 인천시민들로 구성된 ‘인천국제공항 명칭제정추진위원회’가 60만 명 인천시민들의 서명을 받아 신공항의 명칭을 ‘인천국제공항’으로 이끌어 내는 데 온 힘을 쏟았다. 결국 국토부는 인천국제공항을 최종 결정한다.

# 뜻하지 않은 난관에 봉착, 보상 문제

 "배고프면 밭에 나가 농사 지어 끼니 때울 수 있고, 술 생각 나면 바다에 나가 고기 잡아 팔면 되는데 그깟 보상금 몇 푼 받아 나가면 뭐 먹고 살라는 거요. 이대로 영종도에서 살게 내버려 둬요." 당시 신공항건설본부에 몸담았던 윤영표(58)인천공항운영관리㈜ 이사가 전한 상황이다.

7.jpg
▲ 인천공항 T1.
 그는 "당시 주민들과 환경단체 등이 공항 건립을 반대하는 탓에 문전박대 당하는 일은 당연했다. 우리를 반기는 것은 청바지까지 뚫으며 인사하는 ‘모기’뿐이었다"며 "하지만 수없는 설득과 능동적인 협의로 보상 협상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고 30년 전을 회상했다.

 인천공항의 토지 보상은 지역의 뜨거운 화두였다. 지역주민들과 공사 직원 간의 수를 헤아릴 수 없는 협의로 이뤄진 인천공항 보상은 공공사업 추진의 가장 모범적인 선례가 될 정도로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 인천국제공항, 부지 조성공사 첫발을 내딛다

 1990년 6월 14일 인천 중구 영종도가 신공항 건설 입지로 최종 확정됨에 따라 인천국제공항 건설을 위한 준비가 본격 추진된다. 영종도와 용유도 사이를 막아 만조 시 평균 수심 1m 정도인 간석지 4천628만1천㎡와 그 주변 육지부 991만7천㎡ 등 총 56㎢에 이른다.

7-3.jpg
▲ 항공사진으로 본 인천공항 부지 변화
 이는 여의도 면적의 약 18배에 해당한다. 광활한 지역으로 두 섬 사이에 남쪽 6.08㎞, 북쪽 7.3㎞, 동측 3.9㎞의 방조제 등 총 17.3㎞의 방조제를 쌓아 바다와 차단시켰다. 공항부지의 남북 간 거리는 8㎞, 동서 간 거리는 6~10㎞였다.

 인천공항은 간석지 위에 평균 5m 두께로 약 1억8천만㎥의 토사를 쌓아 부지를 조성했다. 1992년 11월에 시작된 부지 조성공사는 남·북측 방조제 축조공사와 동측 순환도로 공사 등 11개 공구로 나눠 진행됐다. 토량 공급을 위해 공항 주변 신불도와 삼목2도, 오성산, 을왕산 등을 절토했다.

# 공항 건설 현장은 전쟁터

 "1997년 인천국제공항 1단계 공사 현장인 영종도에 가기 위해 월미도에 있던 두 개의 선착장을 이용해야만 했다. 대중교통을 여러 번 갈아타며 월미도까지 가는 것도 힘들었지만 무엇보다도 영종도로 출발하는 배 시간을 맞추는 일이 관건이었다. 출근시간에 맞춰 현장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최소 7시에는 배를 타야 한다. 게다가 배를 한 번 놓치면 기본 30분은 더 기다려야 했기에 월미도에는 아침마다 승선을 위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곤 했다." 당시를 떠올리던 윤영표 이사의 말이다.

7-1.jpg
▲ 2017년 인천국제공항이 세계 서비스평가 부문 12연패를 달성했다.
 그는 "영종·인천대교가 건립되기 전 추운 겨울, 오들오들 떨며 배를 기다리던 추억은 그 당시 직원들이라면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라며 "나중에 율도 인근 근로자 전용부두를 만들어 이전보다 수월하게 출퇴근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 인천국제공항을 방문한 대통령들

 인천국제공항은 전직 대통령들의 행사 참여 기록도 간직하고 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1992년 11월 12일 수도권 신국제공항 건설 기공식에 참석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6년 5월 23일 여객터미널 기공식에 참석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개항을 1주일 앞둔 2001년 3월 22일 인천국제공항 개항식에 참석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6년 3월 30일 ‘인천국제공항 자유무역지역 개장식’에 참석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월 12일 인천국제공항 제2여객터미널 개장식에 참석했다.

7-2.jpg
▲ 1992년 11월 수도권 신국제공항 건설 기공식이 열리고 있다.
# 인천국제공항 이제는 세계로 뻗어 나가다

 우여곡절 끝에 인천국제공항은 2001년 제1여객터미널이 개항한 이후 올해 1월 제2여객터미널까지 확장했다. 인천공항은 2004년 흑자 전환 이후 지난해까지 총 매출액 17조3천억 원, 총 영업이익 8조4천억 원, 총 당기순이익 5조 원을 달성했다. 연간 7천200만 명의 여객처리 능력과 500만t 이상의 화물처리가 가능해질 정도로 급성장했다. 최근 쿠웨이트 정부가 발주한 약 1천365억 원 규모의 4터미널 위탁운영권도 수주했다. 걱정과 의심을 뛰어넘어 전 세계에서 인정받는 국제공항으로서의 위상을 높여 가고 있다.

 미래 스마트 공항을 목표로 하고 있는 인천국제공항은 4차 산업혁명 기술 도입으로 공항의 혁신을 주도하고 있다. 더 나은 미래를 향한 도약이다.

 이승훈 기자 hun@kihoilbo.co.kr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