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전벽해(桑田碧海)’. 인천항을 한마디로 설명할 수 있는 사자성어다. 비류가 도읍을 정한 ‘미추홀(彌鄒忽)’은 바로 ‘물의 도시’ 또는 ‘바닷가 마을’을 의미한다. 인천항은 삼국시대와 고려, 조선 역사의 한 편을 장식하며 성장을 거듭해 왔다. 30년 전의 ‘탈냉전 시대’는 인천항이 중국·러시아와의 수교로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인천항은 지역경제의 3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그 위상이 높다. 지금은 동북아 물류 허브와 수도권 해양관광 메카가 목표다.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면 인천항의 현안부터 풀어야 한다. ‘관왕지래(觀往知來)’. 지나간 일을 거울삼아 다가올 미래를 대비해야 인천항의 비전은 현실이 될 것이다. 인천항의 30년 전과 현재의 모습 등을 살펴봤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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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항 내항의 야경.
# 한중 수교와 인천항의 발전

1980년대 우리나라는 세계 20위의 수출국으로 발전했다. 1980년대 중반에는 유가와 금리, 달러화 하락의 ‘3저 효과’로 전량 수입에 의존하던 원유 수입 부담이 줄고 외채 이자 부담이 낮아졌다. 여기에 1988년 서울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로 한중 관계가 급속도로 개선돼 1990년 인천과 중국의 최초 화객선이 오간 인천∼웨이하이(威海) 항로가 개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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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8년 완공된 인천항 갑문.
1992년 한중 수교로 인천항은 대중국 및 북방교역의 창구로 발전한다. 40여 년간 단절됐던 경제 교류가 다시 시작됐다. 인천항의 대중국 수출은 1992∼1993년 수교 직후 200% 이상 증가했다. 이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전후를 제외하고 매년 두 자릿수의 증가율을 기록해 1996년부터 최대 수입국으로 발돋움했다. 카페리 항로 역시 1993년 ‘제1차 한중해운회담’이 열린 뒤 인천∼다롄(大連), 인천∼칭다오(靑島), 인천∼상하이(上海), 인천∼옌타이(煙臺) 항로 등 10개의 바닷길이 열리게 됐다.

# 교류와 단절을 거듭한 인천항의 남북 바닷길

인천∼남포 항로가 처음 개설된 것은 1998년이다. ㈜한성선박의 3천t급 화물선 소나호는 1998년 8월 24일 원단 등의 가공원료가 든 컨테이너 30개를 싣고 인천항 3부두에서 출항했다. 소나호는 북에서 가공한 의류나 가전제품을 싣고 인천항으로 돌아왔다. 그러다 남북 간 해운사의 입장 차이로 2001년 중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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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0년대 후반 인천항 전경.
남북 간 해상 운송은 2005년 8월 ‘남북해운합의서’와 ‘부속합의서’에 따라 다시 본격화했다. 남북한에는 각각 7개 항만의 해상 항로가 개설됐다. 이 중 인천에서는 지금은 사라진 국양해운㈜ 소속 2천800t급 화물선인 트레이드포춘호가 주 1회씩 인천∼남포 항로를 오갔다. 이 배는 적십자 지원물자와 공산품 등을 싣고 북에 전달했다. 북한에서는 2007년부터 3년간 부정기선인 3천t급 북한 선박이 92항차 운항했다.

인천을 통한 북한 전체 물동량은 2005년 424만1천t에서 2006년 1천25만t, 2007년 1천548만t, 2008년 1천211만1천t, 2009년 1천426만t, 2010년 83만2천t을 기록했다. 2010년 3월 천안함 피격 사건 이후 5·24 조치로 남북 교역이 단절될 때까지 총 4억4천34만t의 실적을 올렸다. 컨테이너 물동량도 5만8천445TEU가 포함됐다. 2008~2009년에는 인천항에서 처리한 북한 해상물동량이 2천700만t에 달하기도 했다.

# 인천 남항·북항 개발

1992년 한중 수교로 인천항은 포화상태에 이른다. 인천과 중국을 오가는 배들은 대형화와 고속화·전용선화가 가속화되며 새로운 항만의 필요성이 커져만 갔다. 특히 한중 카페리 항로가 늘어나고 연안도서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국제여객터미널과 연안여객터미널의 증설·신축이 필요했다. 여객과 화물은 늘어나는데 이를 받춰 줄 항만시설이 부족해진 것이다. 이에 남항과 연안부두의 효율적인 관리·운영을 위한 ‘인천남항정비계획’ 등이 수립돼 인천 북항과 인천 남항이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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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남포를 오간 정기 화물선 트레이드 포춘호. <인천해수청 제공>
인천 남항은 1997년부터 컨테이너 전용부두 7개 선석과 잡화부두 1개 선석을 갖춰 모래운반선과 연근해 화물선을 맞이하게 됐다. 인천 북항은 1997년부터 축조공사를 시작해 중구 북성동과 서구 원창동 일원에 5만t급 등 총 17척이 동시에 접안할 수 있는 시설을 갖췄다. 원목과 고철, 사료용 부원료 등 산업원자재 화물을 주로 취급하고 있다.

# 인천신항, 300만TEU 시대 불러오다

2000년대 들어 인천항 물동량이 매년 20% 이상 증가하자 인천 남항·북항과 함께 중국과 동남아 지역, 북한과의 교역에 대비한 거점 항만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특히 정부의 투 포트(부산항·광양항) 정책에 대응해야 한다는 주장이 이어졌다. 2015년 6월 인천 신항은 그렇게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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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조 100주년을 맞은 인천항 갑문 모습. <인천항만공사 제공>
인천 신항 개장 이후 인천항은 달라졌다. 지난해 컨테이너 물동량이 305만TEU를 달성한 것이다. 전문가들은 ‘300만TEU’를 기점으로 글로벌 항만으로서의 능력을 가늠한다고 입을 모은다. 인천항은 신항 개장으로 아시아 권역에서 미주와 중동 지역으로 노선을 확장하고 있다.

인천신항은 현재 1단계 1구역 2공구 조성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 주민 숙원 ‘내항 재개발’

인천항 내항 주변 주민과 상인들은 20여 년간 고철부두인 8부두에서 날리는 먼지와 소음에 시달렸다. 내항 1·8부두를 친수공간으로 만들어 달라는 요구는 10여 년 넘게 이어졌다. 내항의 컨테이너 물동량은 인천 신항에게 넘겨주고, 벌크는 북항에 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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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신항 한진 인천컨테이너터미널에 위치한 크레인들.
정부와 인천시 등은 내항 1∼8부두 전체에 대한 재개발 계획을 다시 짜고 있다. 내항은 수변 산책로 등 친수공간, 청년창업 일자리가 생기는 창작공간, 4차 산업혁명을 수용할 수 있는 스마트 혁신공간 등으로 변신하려고 준비가 한창이다.

# 인천항 미래 비전은

해양수산부는 2016년 12월 ‘인천항 종합발전계획 2030’을 발표하며 인천항의 항만·물류기능을 재편하고 국제·문화·관광도시를 만들겠다고 했다. 인천 신항은 항로를 증심하고 남항 컨테이너부두까지 흡수해 수도권 컨테이너 물류 허브로 육성하겠다는 목표다. 남항의 남은 부두시설은 자동차 클러스터 또는 해양산업 클러스터로 활용할 계획이다. 내항은 시민들에게 반환돼 역사와 문화가 융합된 도시관광 거점으로 거듭난다.

인천항이 글로벌 거점 항만으로 재도약하려면 수많은 파고를 넘어야 한다. 각종 수도권 규제 개선부터 시작해 인천 신항 배후부지 개발과 남항 신국제여객터미널 건설이 시급하다. 내항 재개발 역시 밑그림을 제대로 그려야 시민들의 친수공간으로 거듭날 수 있다. 항만의 물류 이동을 원활하게 하려면 제2외곽순환고속도로 인천∼안산 구간 건설을 비롯한 도로망이 개선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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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컨테이너들이 가득 찬 인천신항 한진 인천컨테이너터미널.
송도 인근 남항에 복합관광단지를 만드는 골든하버 프로젝트도 수년째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여기에 남북 교류 재개를 대비해 인천항이 환황해권 거점 항만으로 발전할 준비도 갖춰야 한다.

김학소 청운대학교 국제통상학과 교수는 무한 글로벌 경쟁시대에 인천항이 발전할 수 있는 해법은 북한이라고 강조한다.

김 교수는 "북한과의 교류 재개를 단기적·미시적으로 접근하면 인천항은 이전처럼 단순히 모래나 광물자원을 가져오는 데 그칠 것"이라며 "인천시와 인천항만공사(IPA), 물류·항만업계와 시민단체까지 힘을 모아 인천항이 북한에서 오는 화물을 해외로 수출하는 대북·대중 물류센터의 역할을 하는 남북 협력 주체의 선봉이 돼야 인천항의 미래가 있다"고 말했다.

김덕현 기자 kdh@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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