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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30]‘일간신문 창간’ 꿈 실현에 들떠… 잊을 수 없는 1988년 여름

그때 그 사람들에게 듣는다

홍봄 기자 spring@kihoilbo.co.kr 2018년 07월 20일 금요일 제6면

‘응답하라 1988!’ 기호일보의 시작에는 언론 자유와 지역 발전을 위해 젊음을 바친 기자들이 있었다. 시행착오 속에서 성장의 씨앗을 심었고, 열정으로 틔운 싹은 지금 더 큰 나무로 자라고 있다. 역사를 열었던 창간 멤버들은 과거 인천 언론의 상황과 30년 세월의 변화를 어떻게 생각할까.

 "30년이 어떻게 흘렀는지. 신문 제작 환경부터 많은 것이 변했지만 창간호를 준비하던 1988년 그해 여름만은 눈에 선해." 시간을 거슬러 안종삼 당시 편집기자(현 일간경기 편집국 인천지역 담당 국장 대우)와 장현일 취재기자(현 서울경제 사회부 인천취재본부장)의 입에서 본보의 뿌리를 되짚어 봤다.

 다음은 본보 창간 기자들과의 일문일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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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호일보 창간멤버로 기자생활을 시작한 장현일·안종삼 기자가 1988년 창간 당시 언론민주화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진우 기자 ljw@kihoilbo.co.kr
 -1988년 당신의 기억 속 기호일보의 시작은.

 ▶안=얼마나 기다렸던가. 꿈에 그리던 일간신문 창간을 이룰 수 있다는 사실에 모두가 환호했고 들떠 있었다. ‘기호신문’으로 시작한 기호일보는 그해 5월 중구청으로 올라가는 길모퉁이에 있는 동방운수 건물에 둥지를 틀고 1층 구석에 윤전기를 설치했다. 당시는 문화공보부의 ‘현장실사’라는 관문을 통과해야 창간이 가능했다. 긴장 속에 실사를 받고 등록증이 회사에 도착했을 때 모두의 환호가 지금도 생생하다.

 ▶장=한마디로 일당백이었다. 편집기자 6명에 취재기자 12명의 적은 인원이었지만 기세가 엄청났다. 주로 폭로 기사를 많이 썼고 정책 반영도 많이 됐다. 예를 들면 어린이공원을 서구 매립지에 만들려고 했던 시 계획이 기사로 인해 변경됐다. 선배가 없었기 때문에 필사를 하며 똘똘 뭉쳐 하나하나 배워 나갔다. 우리 신문을 알리기 위해 내·외근을 가리지 않고 거리로 나가 시민들에게 신문 홍보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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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8년 기호일보 창간 당시 편집기자였던 안종삼 기자가 사령장을 받고 있다.
 -우여곡절도 많았을 것 같다. 잊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나.

 ▶안=창간호 24면을 만들기 위해 6월부터 회사 앞 여관방에 투숙했다. 하루 종일 무릎이 아프도록 앉아 지면을 완성하고 나면 지금은 고인이 되신 당시 편집부장이 "야! 이거 다시 바꿔 봐" 가볍게 한마디 던지시곤 나가셨다. 그러면 청타부터 다시 다 쳐서 오려 붙이기를 반복해야 했다. 그때는 신문 제작 시스템이 워낙 열악해 8면짜리를 만들기 위해 밤샘 작업을 하며 일주일에 두 번 정도만 집에 갈 수 있었다. 젊음이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

 ▶장=창간 멤버로 입사해 항만, 항운노조, 수협, 조달청 등에 출입했다. 차가 없어서 버스와 택시를 이용해 참 열심히도 다녔다. 인천항 입항 1호가 어떤 배인지 기사를 쓰는 등 항만의 역사를 기록했다. 항운노조의 제보를 받고 모 대기업이 인천항에 고급 캠핑카를 수입한 기사를 남긴 것도 기억에 남는다. 계절이 바뀌는 줄도 모르고 매일을 뛰어다니다 보니 창간 1주년인 1989년 7월 회사에서 ‘노력상’을 받았다. 그때는 다들….

 -30년 전은 억압됐던 언론의 자유가 실현된 해이기도 하다. 언론 민주화 상황을 어떻게 기억하나.

 ▶안=1987년 6월 29일 암울했던 시기의 종지부를 찍는 ‘언론기본법’ 폐지라는 당시로서는 놀라운 뉴스가 전 국민의 귀를 울렸다. 당시 언론 통폐합으로 폐간됐던 신문의 복간과 새로운 신문의 창간 러시가 이어졌다. 재벌과 종교단체들이 신문사 창간에 경쟁적으로 뛰어들고, 지면 수 늘리기와 광고 유치 경쟁이 시작됐다. 당시 대부분 석간과 세로짜기였던 신문은 1990년 초 조간 발행을 시작하면서 지금의 모습이 됐다.

 ▶장=당시는 지역 언론이 많지 않았지만 그만큼 목소리를 크게 냈다. 힘들게 언론 자유화를 이뤘기 때문에 다들 사명감을 가지고 일했던 것 같다. 초기에는 경기도에 집중하느라 인천을 등한시 하는 경향도 있었다. 모든 기자들이 자부심과 애사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그 틈에서 뿌리내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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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현일 기자가 1989년 창간 1주년 기념식에서 서강훈 회장에게서 노력상을 받고 있다.
 -과거에 비해 언론환경이 많이 달라졌다. 후배들에게 해 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

 ▶안=1998년께 경기은행이 퇴출되고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의 그늘이 지기 시작했을 때 기호일보의 활약은 어마어마했다. 지금은 기자들이 노력한 덕분에 그때보다 지역에서 입지를 다지고 역할을 잘 하고 있는 것 같다. 앞으로도 창간 때 가졌던 각오와 정신이 이어졌으면 좋겠다.

 ▶장=기호정신을 살려서 비판적인 시각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과거에 비해 언론사도 많아졌고 차별화된 기사를 찾기가 힘들다. 지역신문의 기자로서 독자들을 위한 다양한 뉴스를 제공하려는 노력은 계속 돼야 할 것이다.

 -앞으로 30년, 기호일보에 기대하는 모습은.

 ▶안=수도권 지역에서 제 몫을 하는 신문이 되기를 기대한다. 전이나 지금이나 회사가 건강해야 직원도 최선을 다하고 좋은 기사가 나온다. 지금 기호일보의 후배들을 보면 창간 당시와 변함없이 여전히 ‘일당백’인 것 같다. 회사가 발전하고 규모가 커진 만큼 좋은 기자들도 많이 채용하고 키워야 한다. 기자의 업무가 많아지면 깊이 있는 내용을 놓친다.

 ▶장=기호일보의 ‘기호(畿湖)’는 충청도에서 황해도까지 포함한 지역이다. 이제는 기호일보가 통일시대를 대비해 기호지방을 대표하는 신문으로 성장해 나가기를 바란다. 더 발전하는 기호일보를 응원하겠다. 홍봄 기자 spring@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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