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진흥청과 경기도청 소재지, 선경직물, 삼성전자, 영통, 광교신도시, 수원역. 수원의 과거와 현재를 상징하는 ‘키워드’다. 경기도 수부도시이자 125만 인구로 광역시급 규모를 갖춘 수원시의 변천사를 살펴본다. <편집자 주>

# 수원시 승격과 초기 모습

 수원시가 발행한 「수원시사」 1∼20권 등에 따르면 1949년 8월 15일 수원군 수원읍에서 수원시로 승격됐다. 당시 총 27개 동 규모로 행정구역을 정했다. 시 승격과 동시에 이전까지 수원군에 속해 있던 대부분의 면은 신설된 화성군으로 편입됐다. 1950년대 인구 행정통계를 집계한 「시세일람」을 참고하면 1957년 수원시 인구는 1만3천901가구에 남자 3만5천678명, 여자 3만8천380명으로 총 7만4천58명이 거주했다.

▲ 과거 수원화성문화제 행사의 백미인 능행차 행렬 재현
1963년 수원시는 안룡면·태장면·일왕면 일부 지역이 행정구역에 포함되면서 몸집을 키울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관할 면적이 22.76㎢에서 83.67㎢로 넓어졌다. 행정체계도 법정동 47개, 행정동 18개 동으로 확대되면서 주민 수도 10만 명을 넘었다.

 1960·70년대는 전통의 농업 기반 이래 공업화 약진이 두드러졌다.

 수원은 1906년 일제 통감부가 서둔동에 농업기술의 시험과 조사, 지도 등의 업무를 관장하는 권업모범장을 설치하면서 ‘한국 농업의 산파’ 역할을 해 왔다. 1962년에는 우리나라 농업을 책임지는 ‘농촌진흥청’이 개청하면서 농업과학기술의 시험 및 연구사업, 농촌지도사업 등을 수행하는 등 국가 농업 발전에 기여한 바가 컸다. 서울대학교 농과대학도 2003년 서울로 이전하기 전까지 서둔동에 터를 잡고 생활하면서 농업 발전에 이바지했다.

 같은 시기에 수원지역 내 공업화도 진행되면서 지역 개발이 가속화됐다. 선경합섬 공장 건립을 필두로 삼성전자, 연초제조창(KT&G), 금강(KCC), 한일합섬, 선경화학(SKC) 등의 공장을 유치해 공업화 성장의 교두보를 마련했다.

▲ 현재 전국을 대표하는 지역 축제로 명물로 자리잡은 수원화성문화제 행사 현장.
1967년 경기도청의 수원 이전, 1969년 서울∼수원 간 경부고속도로 개통, 1974년 수도권 지하철 개통은 지방행정의 중심이자 수도권 교통요충지로서 수원시가 명실상부 ‘경기도 수부도시’라는 지위를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됐다.

 수원의 공공체육시설 효시인 공설운동장은 1938년 처음 조성 후 1971년 주경기장, 1984년 실내체육관 신축, 1986년 주경기장 증축, 1988년 야구장 신축 등 시기를 거쳐 현재의 모습에 이르렀다. 올해로 55회째를 맞는 ‘수원화성문화제’가 처음 열린 것도 이 무렵이다. 1964년 경기도청 이전 기공식이 진행된 10월 15일을 기념하고 수원시민의 날을 축하하기 위해 초창기에는 ‘화홍문화제’라는 이름으로 행사를 시작했다.

▲ 수원시는 1980년대 후반부터 신도시 조성으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인구수가 증가했다. 사진은 1980년 후반 신매탄아파트 전경.
 1973년 3월에는 수원을 대표하는 아주대학교의 전신인 ‘아주공업초급대학’이 설립됐다. 1977년에는 대우실업 김우중 사장이 사재를 출연해 대우학원을 설립하고 아주대를 인수하면서 지역을 대표하는 ‘우수 인재 배출의 요람’으로 성장했다.

 1980년대 접어들면서 수원시는 장기 발전적 관점에서 2000년대를 대비한 종합적인 도시개발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1981년에는 대한주택공사(현 LH)가 현재 영통구 매탄동 일원을 매탄지구로 지정하고 택지개발을 진행했다. 대한주택공사는 아주대 근처에 우만택지개발사업을 추진했다. 공장과 시가지 개발도 늘어났다. 매탄동과 신동 일대는 공장이 세워졌으며, 경부선 철도의 서쪽에 위치한 서둔동과 천천동 일대도 시가지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수원역 남쪽에 위치한 세류동 일대도 시가지가 들어서면서 시 전체적으로 주요 번화가가 1970년대보다 외연을 확장한 시기였다.

▲ 1988년 서울올림픽 기념조형물 제막식 현장. <수원시 제공>
 # 광역시급 수부도시로 도약

 현재의 수원은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이뤄진 대규모 택지개발 및 문화·체육 번영기를 맞으면서 그 형태를 갖추게 됐다. 이전까지 수원은 경기도 지방행정의 중심이자 농업 및 공업화가 혼재돼 있던 지역으로, 도시 몸집을 부풀려 외형을 키우는 시기였다.

1980년대 후반부터는 신도시 조성으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주민 수가 늘어나 다양한 여가생활을 보낼 수 있는 각종 시설물 건립이 풍년기를 맞으면서 거주하기 좋은 도시로 성장했다. 「수원시사」 1∼20권 등에 따르면 1991년 원천동과 매탄동 일원에 원천택지개발사업이 실시됐다. 권선동 일원의 녹지지역도 권선택지개발계획이 시행돼 주거지역으로 변모했다. 매탄동·화성군(영통리)·용인군(기흥읍) 일원 328만4천972㎡에는 영통택지개발사업이 추진됐다.

▲ 수원지역 경제의 견인차 역할을 맡고 있는 수원산업단지.
199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아파트 건설이 본격화됐다. 조원동 한일타운, 정자2지구, 천천2지구, 영통지구, 망포지구 등이 대표적이다. 북수원 한복판에 조성된 한일타운 아파트는 1999년 5천300가구 규모로 준공됐다. 2006년에는 서수원권 개발을 통해 시의 균형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호매실택지개발사업이 실시됐다. 동수원에서는 영통구 이의동과 용인시 수지구 상현동 일대에서 광교신도시 조성이 시행됐다.

 산업적 측면에서도 변혁의 물결이 찾아왔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2차 산업의 비중이 가장 높았지만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3차 산업의 비중이 2차 산업의 비중을 추월했다. 현재는 3차 산업 중심의 산업구조로 전환됐다. 분야별로는 1980년대는 섬유, 전기·전자산업 부문, 1990년대는 전기·전자산업, 기계, 운수장비, 의료광학 부문이 증가했다.

2000년대 접어들어서는 삼성전자의 약진과 함께 IT 중심의 전문 과학 및 기술서비스 산업 증가 및 문화산업도시로 비약적인 발전을 꾀했다. 2010년대에 진입한 뒤에는 IT 중심의 첨단산업 기반과 연구중심 산업의 집중, 도소매업 및 교육, 숙박 및 음식 등 사회서비스 관련 산업의 성장이 두드러졌다.

 

▲ 세계에 브랜드 가치를 알리고 있는 삼성전자.
1990년대 중반에는 무질서하게 입지한 소규모 공업지역을 도시 외곽으로 이전할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공업지역 재배치계획도 시행됐다. 수원역 서쪽에 형성된 평동 공업지역이 외곽으로 이전을 추진했으며, 상대적으로 낙후된 고색동과 오목천동 일대가 공업지역으로 지정됐다.

 1905년 1월 1일 개통한 수원역은 경부선의 중추 노선으로 2003년 2월 총면적 6만7천여㎡, 부지 2만여㎡ 규모에 역무시설, 백화점, 편의시설 등을 갖춘 새로운 역사로 재탄생했다.

 2014년 수원역 인근에 개점한 롯데몰은 백화점, 쇼핑몰, 대형 마트, 영화관 등을 갖춘 지하 3층·지상 8층, 총면적 23만㎡ 규모로 건립됐다. 기존 수원역사에 입점한 AK플라자와 함께 매머드급 수원역세권을 형성하면서 수도권을 비롯해 충청권 주민까지 흡수할 정도로 전국적인 유통 격전지로 급부상했다.

▲ 프로야구 kt 위즈 홈구장 등이 들어서 있는 수원종합운동장. <수원시 제공>
 수원의 최대 체육시설도 지어졌다. 2002년 한일 월드컵 개최를 위해 우만동에 관중 4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월드컵경기장을 건설했다. 1996년 착공돼 2001년 준공됐다. 문화도시로서의 면모도 갖추기 시작했다. 1991년 경기도문화의전당 준공, 1999년 수원미술전시관 준공, 2008년 수원박물관 및 수원화성박물관 준공 등 대형 공연시설과 전시시설이 들어섰다. 1995년에는 삼성전자가 인계동에 제1야외음악당을 건설해 시에 기증했다.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된 ‘수원화성’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2003년 7월 1단계 복원공사가 완료돼 건물 482칸이 시민들에게 공개됐다. 올 3월부터는 우화관·별주·장춘각 등 2단계 발굴 및 복원을 진행 중이다.

박종대 기자 pjd@kihoilbo.co.kr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