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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30]인천 소극장 30년

낭만·저항 논하던 무대는 점차 사라졌다
창작정신 살아있는 한 외면할 수 없다

이병기 기자 rove0524@kihoilbo.co.kr 2018년 07월 24일 화요일 제8면

인천은 30여 년 전인 1980년대 후반부터 신포동을 중심으로 한 소극장 르네상스 시대를 맞는다. 인천 최초의 민간 소극장인 ‘카페 깐느’가 1974년 개관한 이후 1978년 인천의 대표 소극장인 돌체가 본격적인 소극장 시대를 이끈다. 1980년대 중·후반에 접어들면서 인천에 다수의 소극장이 생겨나 연극과 공연의 르네상스 시대가 시작된다.

 소극장은 단순히 공연을 보는 공간이 아니라 시대가 소통하는 장소다. 「구술로 보는 인천 민간 소극장사」의 저자인 장구보 구보댄스컴퍼니 대표는 소극장 운동의 원래 모습을 찾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어둑한 공간 속에서 통기타나 차 한 잔, 연극 한 편에 낭만과 철학을 논하던 소극장, 한편으로는 저항정신과 창작적이고 실험적인 정신이 소극장 안에 녹아들어 있다는 얘기다. 지금은 많은 민간 소극장들이 경영적 어려움으로 문을 닫았고, 새롭게 태어난 소극장은 힘겹게 지역에 뿌리내리고 있다. 그때 그 시절 인천의 소극장들을 둘러보자. <편집자 주>

<1980년대> 인천 연극과 소극장의 르네상스

 1980년대 인천 연극의 가장 큰 특징은 활발한 지역 극단의 창단과 그에 따른 민간 소극장이 설립됐다는 점이다. 당시는 극단 수가 늘어난 데 비해 공연장은 공보관과 시민회관, 가톨릭회관 강당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곳들은 연극 전용 극장이 아니었기에 예술적 완성도를 높이거나 관객과 소통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1970년대 카페 깐느와 돌체 탄생을 시작으로 다수의 민간 소극장들이 생겨났고, 이 시기가 인천 연극과 소극장의 르네상스가 된다.

 # 카페 깐느(중구 용동 / 개관 1974년 / 폐관 1976년)

 카페 깐느는 1974년 중구 경동사거리 인근에 개관된 인천 최초의 민간 소극장으로 알려져 있다. 자유극장 단원이기도 했던 인천 출신 이우용 씨가 중구 용동에 개관한 소극장으로 50여 석 정도의 계단식 객석과 원형으로 된 무대로 꾸며졌다. 당시는 경인선이 연결된 동인천 주변이 역세권이었다. 커피값이 한 잔에 200~300원 정도였는데, 카페 깐느는 입장료로 다소 비싼 1천 원을 받았다.

 공연물로는 극단 ‘자유극단’이나 ‘민예극장’ 등과의 교류 작품 또는 지역에서 전무송·조일도 씨 등과의 작업을 통해 유명 극단의 작품을 재공연하거나 자체적으로 제작해 공연하기도 했다고 알려진다. 일부 대학생들이 카페 깐느를 찾았으나 경영상 어려움으로 곧 문을 닫는다.

▲ 과거(왼쪽)와 현재 돌체 소극장 외부.
 # 돌체(중구 경동 / 개관 1978년 / 현재)

 1980년대 들어 인천에서는 본격적으로 소극장 운동이 시작된다. 민간 소극장의 선두 주자이자 현재까지 명맥을 잇고 있는 돌체는 명실상부한 인천의 대표 소극장이다. 돌체 소극장 개관 이후 경동예술극장과 미추홀 소극장 등이 개관하면서 본격적인 르네상스 시대가 펼쳐진다.

 최초 설립자인 유용호 씨는 ‘호산나 합창단’ 출신으로 개관 초기에는 음악 운동적 차원의 활동을 중심으로 했다. 이후 돌체 소극장을 인수한 정준석 씨는 본격적인 연극 공연을 도입해 돌체를 연극 전용 극장으로 확립하는 데 기여했고, 1983년에는 마이미스트인 최규호·박상숙 부부에게 운영권이 넘어갔다. 현재는 미추홀구 도호부청사 옆으로 자리를 옮겨 ‘작은극장 돌체’로 명맥을 잇고 있다.

▲ 과거 돌체 소극장 공연 모습
 # 경동예술극장(중구 경동 / 개관 1984년 / 폐관 1987년)

 경동예술극장은 돌체에 이어 인천지역의 두 번째 연극 전용 소극장이다. 연극인 정진 씨가 경동 박문국교 옆 건물을 빌려서 만든 소극장으로 객석은 70석 정도였으나 100명 정도는 수용 가능했고 사무실과 분장실 등을 갖췄다.

 작은 체구와 못생긴 외모로 더 유명한 정진 씨는 당시 MBC에서 방영한 월화드라마 ‘조선왕조 500년-설중매’에서 ‘한명회’ 역할로 인기를 끌었고, 출연료로 모은 자금을 소극장 개관에 투자했다는 후문이다. 동산고와 동국대 연영과를 졸업했으며 인천시립극단 4대 예술감독을 역임했다.

 경동예술극장은 베케트의 ‘연극’을 개관공연으로 올린 후 ‘데미안’,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어린’, ‘가출기’ 등을 무대에 올렸다. 이후 3년 만에 ‘콜렉터’를 마지막 공연으로 문을 닫았다.

 # 신포아트홀(중구 신포동 / 개관 1987년 / 폐관 1992년)

 신포아트홀은 인천의 명동으로 불렸던 신포동에 위치했다. 당시 서울예전 출신 배우였던 권선빈 씨가 상설로 공연할 수 있는 연극 전용 소극장을 갖고 싶어 했고, 이후 오빠인 권용성 씨가 개관했다. 권선빈 씨와 남편인 중앙대 출신 배우 이진성 씨는 연극 작품 활동에 주력했고, 권용성 씨는 극장 경영에 힘쓰는 이원적 구조를 가졌다. 그러나 인천 연극의 전성기였음에도 공연을 한 번 하고 나면 적자가 수백만 원씩 나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동생 내외가 만든 극단 ‘중앙’은 주로 지방 공연을 많이 다녔고, 후에 권용성 씨가 별개의 ‘예술무대’라는 극단을 만들어 운영했다. 단원들이 밤에 풀통을 메고 포스터를 붙이고 다니는 등 정과 의리로 활동하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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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추홀소극장 개관 기념 ‘홍당무’ 공연 후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배우들.
# 미추홀 소극장(중구 내동 / 개관 1988년 / 폐관 1990년)

 미추홀 소극장은 중견 연극인 김종원 씨가 만들었다. 연극은 물론 음악과 무용까지 유치하는 등 활발한 소극장 운동을 이어왔다. 개관 기념공연으로 ‘홍당무’와 ‘맨발로 공원을’, ‘닭 잡아먹고 오리발 내밀기’ 등 3편을 연달아 무대에 올렸다.

 김종원 대표는 1981년 극단 ‘미추홀’을 창단해 왕성한 활동을 시작했고, 1985년 ‘떼아뜨르 4막5장’이라는 레스토랑식 극장을 운영하다가 홍예문을 올라가는 길에 위치한 건물에 미추홀 소극장을 개관했다. 극단 ‘미추홀’은 이전까지 돌체 소극장에서 ‘이수일과 심순애’, ‘약장사’ 등을 공연하다가 미추홀 소극장 개관공연으로 ‘홍당무’를 올렸다.

 당시 미추홀 소극장은 주변에 인천여고와 제물포고, 인일여고 등이 위치해 있어 학생들이 연극을 보기 위해 늘어선 모습도 보였다고 전해진다.

▲ 배다리예술극장에서 연습하거나 대화를 나누는 배우들.
 # 배다리예술극장(중구 율목동 / 개관 1988년 / 폐관 1990년)

 배다리예술극장은 극단 ‘피어나’ 대표인 이정환 씨와 극단 ‘엘칸토’가 이문형 등 뜻 있는 후원자와 단원들의 힘을 모아 율목동에 만든 소극장이다. ‘낚시터 전쟁’, ‘학자와 거지’, ‘신의 아그네스’, ‘아가씨 손길을 부드럽게’,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 등 많은 작품이 공연됐다. 당시 ‘신의 아그네스’가 성공하면서 단원들에게 두 달 동안 월급제를 운영하기도 했으며, 극단 전용 자동차까지 샀다고 한다. 이어 기획작품인 ‘방황하는 별들’과 ‘블랙코미디’ 등이 히트를 쳤다고 알려진다.

 방통대 연극동아리 학생들이 해마다 두세 차례씩 공연을 올리기도 했으며 직장반과 학생반, 일반반 등 70여 명의 회원이 참여하는 워크숍도 진행됐다.

<1990년대> 아동극 전문극장의 번성

 1990년대는 경제성장과 국민 소득수준의 향상, 가치관의 변화 등으로 국민의 여가수요가 늘어나게 된다. 백화점이 고객 유치의 일환으로 어린이 공연을 주로 유치하는 전문 공연장을 갖추고, 여기에 키즈마케팅의 개념이 번성하면서 아동과 소비가 문화시장에 확산·파급되는 형상을 보인다. 시대적 변화 속에 인천에서도 어린이 전용 소극장이 생겨난다. 이 시기 대부분의 민간 소극장은 어린이 소극장을 표방했으며, 과거 신포동에 밀집했던 것과는 달리 지역이 확산되는 양상을 보인다. 하지만 다수의 소극장들은 경영난을 버티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 꿈나무 어린이소극장(부평구 마장로 / 개관 1989 ~ 1990년 / 폐관 2000년)

 꿈나무 어린이소극장은 1989년과 1990년 사이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어린이 소극장이다.

 1대 대표였던 김창준 씨는 소극장 개관 전까지 인천에서 다양한 연극활동을 진행했다. 1977년 극단 ‘객석’을 등록한 데 이어 연극 ‘약장사’와 ‘마지막 테이프’ 등을 공연했다. 개관 2년 후 2대 대표인 김태용 씨가 이어받았다.

 당시는 극단에 상주하는 조명감독이 따로 있을 정도로 전문성을 지니고 있었다. 통상 2주에 한 번씩 작품을 바꿔 공연을 하고, 서울에 있는 어린이극 팀이 오면 2주 동안 공연을 올리는 등 아동극을 하는 단체는 꼭 거쳐 가야 하는 소극장으로 이름을 알렸다. 특히 1996년에는 ‘도깨비와 혹부리 영감’이라는 작품이 미국 LA 한인의 날에 초청을 받아 최초 어린이극 해외 공연도 진행했다.

▲ 과거 마루나 소극장 외부
# 마루나 소극장(남동구 구월3동 / 개관 1995년 / 폐관 1998년)

 극장 대표인 유인석 씨는 1983년부터 연극을 시작했다. 1987년부터 부천에서 활동했고 1993년에는 시흥시에 초청돼 공연을 하기도 했다. 이후 민선 초기 정무부시장의 도움을 받아 장소를 알아보다가 인천문화예술회관이 있는 구월동에 소극장을 만들면 대학로처럼 어우러지는 분위기가 형성될까 싶어 건설회관 사거리에 마루나 소극장을 개관한 것으로 알려진다. 극단 ‘마루나’도 극장과 함께 시작된다.

 오픈 개관으로 ‘왕이 된 허수아비’란 모노드라마를 한 달 정도 공연했는데 관객이 없어 고전을 면치 못했다고 한다. 역시 운영상 어려움으로 3년 만에 문을 닫았다.

# 학동예술회관(연수구 연수동 / 개관 1997년 / 폐관 1999년)

 기자 출신인 차흥빈 씨는 1997년 학동예술회관을 개관해 상근직원 한 명을 두고 운영을 시작한다. 당시에는 일반 성인극으로는 경영상 어려움이 불 보듯 뻔해 어린이 전용 극장을 통해 수익활동을 하고, 그 수익금을 성인극의 제작비로 투자하는 목표를 갖고 시작했다고 알려진다. 유치원과 초등학교의 체험학습을 타깃으로 잡았지만 학교 단체관람을 유도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 인토 소극장(연수구 연수동 / 개관 1998년 / 폐관 2002년)

 인토 소극장은 이광석 대표가 인천상륙작전기념관 맞은편에 개관한 소극장이다. 사람 ‘인(人)’과 흙 ‘토(土)’자를 써서 사람은 흙을 밟고 살아야 한다는 인간 중심의 메시지를 담은 극단 ‘인토’를 먼저 창단하고 150석 규모의 소극장을 개관했다. 이후 두 차례 자리를 옮겼다.

 대표적 공연으로 ‘마술가게’와 ‘오즈의 마법사’, ‘방황하는 별들’이 무대에 올랐고, 해마다 청소년들이나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팀을 나눠 공연할 정도로 왕성한 활동을 했다고 전해진다.

▲ 내 이름은 라꾸꺼
# 보물상자 소극장(연수구 선학동 / 개관 1998년 / 폐관 2008년)

 보물상자는 1998년부터 10년 동안 어린이 전용 극장으로 운영됐다. 30여 명의 직원이 근무했을 정도로 규모가 있었으며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다양한 공연물을 직접 제작했다.

 오영일 대표는 대학교 때 인형극을 한 후 회사에 다니다가 1992년 극단 ‘보물상자’를 재창단했다. 특히 예술경영적인 측면에 관심을 갖고 운영하다가 티켓 예매사이트인 엔티켓을 만들었고, 「컬쳐인」이라는 잡지도 발간했다.

▲ 동쪽나라 연극실험실 공연 모습.
# 동쪽나라 연극실험실(미추홀구 인주대로 / 개관 1998년 / 폐관 2001년)

 극단 ‘동쪽나라’와 극장 ‘동쪽나라 연극실험실’은 배우 안순동 씨가 직접 무대를 만들어 개관한 소극장이다. 안순동 대표는 이전까지 서울에서 활동했으며 1990년대 중반께 결혼과 함께 인천과 인연을 맺었다. 대표 공연으로 ‘진돗개 백구의 모험’을 비롯해 ‘삼년고개’가 있으며, 지역사회와 함께 ‘여름연극제’를 진행했다.

 그러나 관객층이 서울로 빠져나가고 IMF까지 겹치면서 운영에 어려움을 겪다 폐관했다.

<인천 소극장의 제언>

 30년이 넘게 이어진 인천 소극장의 역사는 신포동 르네상스 시기를 거치지만 인구 증가와 도시 건설로 공간적 한계를 맞는다. 소박하고 밀도 있는 관객과의 소통과 진솔한 문화적 공간은 문화예술회관 및 그 산하 예술단체와 경쟁해야 했고, 1990년대 이후에는 백화점이라는 또 다른 시장과 맞서 변형을 이뤄 왔다. 그 속에서도 아직 다수의 소극장들은 소박한 커뮤니티를 형성하며 인천 소극장 르네상스를 다시 꿈꾸고 있다.

 장구보 대표는 "빠르게 변하는 시대 속에서 우리의 창작적이고 실험적인 소박한 무대가 대형 공연물에 외면당하고 무대에서 무언가를 소통하고자 한다는 것이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며 "그렇다고 계속 외면하고 멀리하거나 사라지게 둬야 하는지는 고민해 볼 부분"이라고 강조한다.

 이어 "현재의 어려운 시점에서 소극장 운동 문화의 원래 취지와 정신을 다시 한 번 돌이켜 봐야 할 때"라며 "정체성 있는 소극장 문화 구축과 활성화를 위해 모두가 노력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병기 기자 rove0524@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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