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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일 정의당 노회찬 원내대표가 미국 방문을 마치고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하는 모습(왼쪽)과 23일 서울 신촌 세브란스에 차려진 노회찬 의원 빈소 앞에서 정의당 최석 대변인이 정의당 대표단 긴급회의 결과를 발표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여야 정치권이 23일 정의당 노회찬 의원의 투신 사망 소식에 침통함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정의당 의원들과 전날까지 함께 3박 5일 일정으로 미국을 다녀온 여야 원내대표들은 믿기지 않는다며 황망해했다. 당초 여야 4개 교섭단체 원내대표들은 방미를 계기로 협치 분위기를 살려 이날 오전 11시 국회에서 민생·개혁 법안 처리 등을 논의할 예정이었으나 회동을 취소했다.

더불어민주당 홍영표 원내대표는 기자들에게 "방미 일정 중에 어떤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전혀 갖지 않았다"며 "노 대표는 사회적 약자를 위해 온몸을 던져 일해 온 정치인인데 너무나 아까운 분을 잃었다"고 비통해했다.

자유한국당 김성태 원내대표도 "너무 마음이 아프고 충격적"이라며 "노동운동가 출신으로 나와 각별한 인연"이라며 침통해했다.

김 원내대표는 방미 일정 중 노 의원이 특검 수사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는지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단 한 번도 드루킹 관련한 이야기를 서로 주고받은 적이 없었다"고 답했다.

정의당 의원들은 큰 충격에 휩싸였다.

정의당 최석 대변인은 이날 국회 정론관에서 "오늘 오전 우리 당 노 원내대표에 대한 황망한 비보가 있었다"며 "자세한 사항은 파악 중"이라고 간략하게 브리핑을 하고 자리를 떴다.

최 대변인은 기자들에게 "억측과 무분별한 취재를 삼갈 것을 언론인 여러분께 정중히 요청드린다"고 덧붙였다.

이날 운명을 달리한 노회찬 의원은 한국 진보정치 진영의 간판스타였다.

재치있고 논리적이며 대중 친화적인 언변으로 큰 인기를 얻어 소수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과 정의당의 인지도를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고인은 고등학생 시절이던 1973년 당시 유신 독재에 반대하며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전기용접 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해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인천지역 민주노동자연맹 사건으로 1989년 구속돼 만기 출소 후 대선에서 백기완 후보 선거대책본부에서 활동했다. 17대 총선에서 민주노동당 비례대표로 첫 의정 활동을 시작했고 2012년 19대 총선에서 서울 노원병 지역구 의원으로 재선에 성공했다.

20대 총선에서는 서울 노원병이 아닌 경남 창원 성산으로 내려가 새누리당 후보를 꺾고 당선되는 기염을 토했다.

올해 4월에는 민주평화당과 공동 교섭단체인 평화와 정의를 위한 의원모임을 출범시키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고, 첫 원내대표를 맡아 원내에서 개혁적인 목소리를 내는데 앞장섰다.

최근에는 국회의원 특권 내려놓기의 하나로 특수활동비 폐지를 주장했고, 교섭단체 대표로서 받은 특수활동비를 일괄 반납해 주목을 받기도 했다.

여야 원내대표들과 방미 중 "어떤 불법 자금도 받지 않았으며 수사에 당당히 임해 진실을 밝히겠다"고 했던 그는 이날 "금전은 받았으나 청탁과 무관했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투신했다.

박태영 기자 pty@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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