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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사연 수필가

하늘에서 내려다 본 황허(黃河)는 장마로 범람한 듯 흙탕물 천지여서 여기가 중국이라는 사실을 실감케 한다.

 황토고원지대에서 흘러온 진흙의 농도는 물 1말에 진흙 6되라고 할 정도로 탁하고, 칭하이성 내 야허라다쩌산 5천442m 정상에서 발원해 곡선을 그리며 굽이굽이 휘도는 물줄기는 5천464㎞에 이른다.

 1955년 중국 정부는 황허의 수해를 근절하기 위해 강 중류에 계단식 댐을 건설하고 황토의 유실을 막아 물을 맑게 하는 대공사를 착공했다.

 요즘 우리는 전직 대통령의 4대강 사업을 두고 시끄럽지만 중국은 1기 공사만으로도 50년 이상이 소요되는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중국의 역사는 황허 치수(治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요순(堯舜)시절 태평성대에도 홍수로 인한 범람과 가뭄이 심해 물을 다스리지 못한 곤(鯤)은 죽임을 당했다. 그의 위업을 물려받은 아들 우(禹)는 아버지의 실패를 거울 삼아 13년간 집에도 들르지 않고 고생한 덕분에 치수에 성공해 하(夏)나라의 왕으로 등극했다. 그래서 그를 가리켜 황하를 다스리고 백성을 구한 왕이라 하여 ‘대우(大禹)’라 칭한다.

 황허의 상류에는 용문(龍門)협곡이 있다. 강줄기가 산서성 용문(지금의 한청, 漢城))에 이르러 산에 막혀 범람하자 우(禹)는 도끼로 내리쳐 좁은 통로를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다. 즉 우가 물길을 텄다 하여 이 지역은 현재도 우문구(禹門口)라는 지명으로 불리고 있다.

 이곳은 장구처럼 가운데는 폭이 좁고 양쪽은 넓은 상류와 하류가 흘러 병목현상을 일으키므로 물살이 거세다. 그 물줄기가 너무 세차 이를 헤치고 하류에서 상류의 용문을 향해 거꾸로 올라올 수 있는 잉어는 드물었다. 해서 어렵게 성공해 올라온 잉어는 용으로 승천했고 실패한 무리는 평범한 물고기가 됐다 하여 등용문(登龍門)이란 말이 생겼다.

 지금도 어려운 관문을 통과하거나 출세를 하면 등용문에 오른다고 칭송한다. 용문의 주민들은 용이 된 잉어가 다름 아닌 이 지역 출신인 사마천(司馬遷)이라고 여긴다.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은 공자가 ‘춘추(春秋)’를 남겼듯이 불후의 역사서를 남기고픈 욕망에 열심히 학문을 닦았고 사마천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물려받았다. 그가 36세에서 56세까지 20년간 쓴 사기(史記)에는 중국 고대 신화부터 혼란스러운 춘추전국시대, 중국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제, 그가 살던 한(漢)무제(武帝) 시대까지의 인물들을 기술했다. 사마천이 사기를 쓸 수 있었던 것은 만 권의 책을 읽고(讀萬券書) 만 리 길을 여행하며(行萬里路) 자료를 수집했기 때문이다. 사마천 사당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사필소세(史筆昭世)란 패방이 보인다. 이는 ‘역사가의 붓이 세상을 밝힌다’는 뜻이다. 사마천의 사당에는 사성천추(史聖千秋)란 현판이 걸려 있는데 ‘역사학의 성인(聖人)으로 천년을 누릴 만한 영웅’이란 뜻이다. 그를 가리키는 또 다른 사자성어는 ‘인욕부중(忍辱負重)’이 있다. 치욕을 참고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을 끝까지 진다는 뜻이다.

 사마천은 무제(武帝)의 명령을 받아 흉노를 정벌하러 전쟁터에 나갔다가 패해 포로가 된 ‘이릉’장수의 참수를 반대했다가 황제의 미움을 사 사형을 당하게 된다. 사형을 면하는 길은 50만 전이라는 거금을 내거나 고환과 성기를 잘리는 궁형(宮刑)을 당하는 것이다.

 미완성된 사기(史記)를 완성하기 위해 살아야만 했던 그는 목숨 값을 치를 돈이 없어 결국 굴욕적인 궁형을 택했고 그 치욕을 참고 끝내 주어진 책임을 완수했다. 그러나 위대한 명성과 달리 사당 뒤에 있는 둥근 석탑묘에는 정작 사마천의 시신이 없다.

 인생의 무상함에 고개를 하늘로 향한다. 때마침 묘지 위 창공에 떠있는 조각구름이 저 건너 유유히 흐르고 있는 황하를 내려다보고 있다. 마치 사마천의 외로운 혼백이 구름으로 환생한 모습이다. 어머니의 강이라 불리는 황허(黃河)는 등용문(登龍門)을 낳고 중국의 역사는 등용문의 주인공 사마천(司馬遷)을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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