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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덕우 <사>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
1888년 11월 조선의 조병직(趙秉稷), 청나라 원세개(袁世凱), 일본 긴토오(近藤眞鋤), 주한미국공사 딘스모어(Diensmore), 주한독일공사 크리엔(Krien), 주한영국총영사 푸드(Food), 주한러시아공사 웨베르(Waeber) 등 각국 대표들이 모여 인천제물포각국조계장정 제1조에 나오는 ‘인천제물포각국조계지도’(Plan of General Foreign Settlement at Chemulpo)에 공동 서명했다.

 이 지도는 러시안으로 해관 직원이었던 사바찐이 이해 7월 2일 측량을 마치고 서명한 도면(圖面)으로 이를 공식 인정한 것이다. 각국조계지도는 이미 1884년에 작성된 바가 있었는데, 이때 확정된 도면은 기존 조약국인 미국, 영국, 독일 이외에 러시아의 서명이 첨부된 것이 특이하다. 러시아는 조로수호통상조약이 1885년에 체결돼 초기 각국조계장정 작성 시에는 참여할 수 없었다.

그러한 연유로 각국 조계의 지분도 확보하지 못했지만, 조약국으로서 조계 내의 권한을 일정 부분이라도 인정받으려 했던 정치적 의사 표현이며, 이는 러시아 공사 웨베르 개인의 외교적 수완이 발휘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 도면에는 ‘Public Garden’을 명시하고 있어, 후일 우리에게 친숙한 ‘각국공원’, ‘만국공원’이라는 한국 최초의 서구식 공원이 있었음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각국공원이 곧바로 오늘날과 같은 공원의 기능을 수행하였는지는 미지수이나, 이미 세창양행 숙사가 1884년에 건립돼 있어 서구식 공원으로서의 품격은 어느 정도 갖춰 있었다 할 것이다.

이보다 9년 뒤 1897년에 조성되는 파고다공원은 영국인 고문 총세무사 브라운이 폐허로 변한 원각사지를 공원으로 바꾸자고 건의해 조성된 것인데, 이와 비교할 때 서구식 공원으로의 공간 활용은 각국공원이 압권이었다. 더욱이 각국의 경쟁 심리가 더해져 견고하고 화려한 서양식 공관과 호텔 등이 건축되고 있었다.

 인천에 개설된 각국조계는 일본 및 청국조계를 감싸는 총면적 46만2천800여㎡ 규모였으나, 1888년에야 이르러 각국공동조계가 정식 출범한 것은 각국조계 내의 토지 경매가 지지부진했기 때문이라 한다. 그러나 일본인이 급증하면서 서양인들은 일본인들을 상대로 토지를 빌려주고 임대료를 톡톡히 챙길 수 있었다. 1891년께 각국조계 내에 거주한 구미인은 37명이었다. 각국조계는 해마다 막대한 조계 기금을 비축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각국공원과 같은 공공시설도 갖출 수 있었다.

 반면 각국조계에 거류하는 3천 명의 일본인들은 해마다 지대와 집세를 불과 몇 명밖에 안 되는 서양인에게 지불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한반도 침략사에서 수치스러운 사례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1879년께 제작된 ‘화도진도’에는 상기동(上基洞)이라는 지명이 기재돼 이미 ‘웃터골’의 존재와 서해일대를 조망하는 요망대(瞭望臺)가 설치돼 있어 군사 지리적으로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게 한다.

공원으로 지정된 후 존스턴별장, 바우만별장, 기상대 등 서구식 근대 건축물이 들어섰다. 일본은 1890년 지금의 인천여상 자리에 인천신사(神社)를 설치함과 동시에 그 일대를 (동)공원으로 하였는데, 1914년 각국조계지가 없어지면서 각국공원은 서공원이라 개칭했다. 그러나 각국공원이 갖는 상징성은 3·1운동 당시 한성임시정부 수립을 도모하기 위해 전국 13도 대표자회를 개최하려 했던 현장이었던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광복 후 서공원은 한동안 만국공원으로 불렸다. 그러다가 1957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제7주년 기념일을 맞아 맥아더 장군 동상 제막식을 거국적으로 성대히 개최했는데 이 시기에 공원의 명칭 변경 논의가 함께 진행됐다. 당시 김정렬 인천시장은 만국공원이 구한말 치욕적인 각국조계 제도의 소산이라는 이유로 이해 10월 3일 개천절을 기해 자유공원으로 명명하고 이를 공포했다. 이후 연오정, 석정루 등이 들어서고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아왔지만 아직도 근·현대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경험한 현장으로 기억되고 있다. 쉼터로서 쾌적한 환경을 조성하는 일은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지만, 각국공원의 옛 영화는 이제 자유공원이라는 이름으로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한국 최초 서양식 공원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변신도 모색돼야 할 것이다.

 ▣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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