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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사연 인천문인협회 이사

오래 전, 아들이 모 대학에 입학했을 때의 일이다. 아들은 합격증을 받아 오면서 토익 테이프 상자를 들고 왔다.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아 자초지종을 물었다. 학과 선배를 사칭한 청년은 아들을 한 강의실로 데려갔다. 그는, 취업난이 극심한 현실에선 토익 서클에 가입하는 것이 제일 현명한 일이며, 토익 서클에 가입 시 4년간 모의고사를 무료로 치르게 해준다고 미끼를 던졌다.

 고득점자는 외국 어학연수를 보내준다고 했으며 빨리 가입할수록 우선순위가 된다고 부추기며 매주 3일간 영문과 교수님들의 토익 강의를 들을 수 있다고 했다.

 아들이 테이프 가격 35만6천 원이 비싸다고 하자 그 금액 중엔 4년간 서클 회비와 교수님 강사료가 포함됐다고 받아 넘겼다.

 아들은 집에 가서 부모님과 상의한 후 가입하겠다고 했으나 청년은 우선 서클 가입비를 내라고 유인했다. 가진 돈이 3천 원밖에 없다고 하자 청년은 돈을 받아 자신의 지갑에 넣고 교탁 옆에 서 있는 다른 사내에게 인계했다.

 그 사내는 아들의 주소와 이름을 물은 후 손바닥만 한 용지(납입 청구서)에 서명을 하라고 한 후 테이프와 접수증(영수증)을 아들에게 건네줬다. 물론 계약서조차 보여주지 않았기에 아들은 구입한다고 생각지 않고 부모님과 상의한 후 입학식 날 서클 사무실로 반환해도 된다는 뜻으로 알고 받아 왔던 것이다. 불길한 예감이 들어 학교 측에 서클을 확인해 보라고 일렀다. 추측한 대로 대학엔 토익 서클이 존재하지 않았다. 친구와의 대화 중 그의 아들도 작년에 이와 같은 피해를 당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됐다.

 되돌려 줄 연락처를 수소문하던 어느 날, 그동안 연락이 없던 판매업자 측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가 왔다. 대전 동구 용전동 145-7, 국가고시 문화원이란 곳에서 보낸 연체료 3만5천600원을 포함한 39만1천 원짜리 청구서였다.

 어이가 없었다. 잘못된 내용을 지적하기 위해 그날 저녁, 국가고시 문화원에 두 번이나 전화를 걸었다. 그간 잘못된 내용을 사장에게 전하기 위해 여사무원에게 팩스 번호를 물었으나 가르쳐줄 수 없다고 했다. 사장을 바꿔 달라고 하자 출장 중이라며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는 등 무례를 서슴지 않았다.

 대화를 나눌 수 없어 다음 날 아침, 테이프를 반송했다. 하지만 그들의 계획적인 수취 거부로 일주일 만에 되돌아 왔다. 그제야 물품을 개봉해 보았다. 테이프와 책자의 가격이 인쇄돼 있지 않았고 판권 인지도 붙어 있지 않았다.

 국가고시 문화원이 대전 동구 세무서에 사업자 등록을 하고 판매 영업을 하고 있는지, 음반(테이프) 제작과 출판(인쇄) 등록을 정식으로 마쳤는지 의심스러웠다.

 온라인 통장을 압수 수색했을 때 과연 탈세는 하고 있지 않은지, 정가도 인쇄돼 있지 않은 물건을 교수의 강사료와 모의고사 수험료와 4년간 서클 회비가 포함된 가격이라며 임의로 결정해 소비자에게 요구할 수 있는지 이해가 안 갔다.

 며칠 후, 두 번째 지급 서신 통고장이 왔다. 고의로 늦게 발송한 듯 우편물이 도착하기도 전 날짜에 대금을 송금하지 않으면 아들을 절도죄로 형사 고발하고 재산을 압류한다는 내용이었다.

 매번 송금 날짜가 지난 후 청구서를 보내고 우편물을 주택이 아닌 상가로 보내면서 배달 사고가 나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일반 우편으로 보낸 저의가 의심스러웠다.

 사장과 통화를 요구할 적마다 출장 중이라며 바꿔 주지 않고, 상담 전화를 받는 여직원이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 당돌함 등 의혹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순간, 소비자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는 곳이 ‘한국소비자보호원’이라는 방송을 들은 기억이 떠올랐다. 114를 통해 연락처를 알아낸 후 자초지종을 밝히며 자문을 구했다.

 소비자보호원은 국가고시 문화원에 내용 증명을 보내며 배달 증명을 요청하면 그 업체의 책임자 이름을 알 수 있다고 알려 줬다.

 내용 증명을 읽어본 우체국 여직원은 분개하며 판매업체 사장이 양심이 있다면 테이프를 받을 것이라고 나를 안심시켜 줬다.

 며칠 후 발송한 테이프는 다시 수취 거부로 반송해 왔으며 한술 더 떠 ‘법정 예정일: 6월 14일. 착수 예정 지원: 대전지방법원. 청구 금액 39만1천600원’의 통고장을 보내 왔다. 반면에 배달증명을 통해 책임자의 이름을 알 수 있었다.

 소비자보호원은 ‘전에 발송한 내용 증명 사본, 두 번이나 소포를 보냈으나 수취 거부한 기록, 계약서를 작성 않고 사기로 강매한 사실 확인서, 아들이 미성년자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서류’를 팩스로 보내달라고 했다.

 소비자보호원 담당자는 형사고발까지도 고려하고 있는 나의 강경한 의중을 판매업체에 전하며 반품시킨 테이프를 접수하도록 압력을 넣었다.

 결국 소비자보호원 덕분에 토익 테이프 사기 사건은 해결됐다. 어려움을 당한 서민들에게 소비자보호원은 중국의 사극에 나오는 ‘정의의 심판자 포청천’이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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