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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선신 농협대학교 교수
‘지체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Justice delayed is justice denied)’라는 법언(法諺)이 의미하듯이, 아무리 훌륭한 판결이라 할지라도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려 나오게 되면 별 소용이 없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우리 헌법은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국민의 기본권으로 보장하고 있다(제27조 제3항).

 이를 규정한 법 규정들도 있다. 민사사건의 경우 민사소송법은 "판결은 소가 제기된 날부터 4월 이내에 선고한다. 다만, 항소심 및 상고심에서는 기록을 받은 날부터 5월 이내에 선고한다"는 규정을 두고 있다(제199조).

 또한 형사사건의 경우 소송촉진 등에 관한 특례법은 "판결의 선고는 제1심에서는 공소가 제기된 날부터 6개월 이내에, 항소심 및 상고심에서는 기록을 송부받은 날부터 4개월 이내에 하여야 한다"는 규정을 두고 있다(제21조).

 그리고 선거사건의 경우 공직선거법은 "선거범에 관한 판결 선고는 1심은 공소 제기된 날부터 6월 이내에, 2심, 3심은 전심 판결 선고일부터 각 3월 이내에 반드시 해야 한다"는 규정을 두고 있다(제270조).

 그런데, 헌법재판소는 1999년 9월 16일 법관에게는 신속히 재판해야 할 어떠한 법률상 의무나 헌법상 의무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취지로 판시했다(98헌마75 사건). 대법원도 역시 신속 재판 의무에 관한 규정들이 강행성 없는 단순한 ‘훈시규정(訓示規定)’에 불과하다면서, 이에 구속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납득하기 어렵다. 재판을 담당하는 사법기관(司法機關)이 스스로는 법을 안 지키면서 법 위반을 이유로 국민들을 심판하는 것이 과연 가당한가.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는 정녕 ‘죽은 권리’에 불과하고, 헌법 규정은 공허한 수사(修辭)에 불과한 것인가.

 재판 지연이 도(度)를 넘고 있다. 5년, 10년이 넘도록 재판이 지연되는 사례가 수두룩하다. 그 이유로는 사건 폭주로 인한 업무량 증대, 제도상의 문제(해고사건 등은 노동위의 심판을 포함해 사실상 5심제로 운영된다), 헌법재판소와 대법원 간의 갈등(헌재는 재판이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할 경우 한정위헌 결정을 할 수 있다는 입장인 반면 대법원은 법률 해석 적용권은 전적으로 법원의 권한이라고 본다) 등 구조적 문제점들도 있지만, 고의로 재판을 지연시킨다는 의심을 받을 만한 사안들도 다수 있다.

 지난 2017년 4월 27일 대법원 특별2부(주심 대법관 김창석)는 제18대 대통령선거 개표 과정에 부정이 있었다며 한영수, 김필원 등 시민 6천644명이 원고로 참여한 선거무효소송에 대해 4년 만에 각하 결정을 내렸다. 대법원은 보도자료를 통해 "박근혜 전 대통령이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결정으로 파면됨으로써, 원고들이 더 이상 제18대 대통령선거의 무효를 구할 법률상 이익이 없게 되었다"며 각하의 이유를 설명했다. 대법원은 이 사건(2013수18)에 대해 2013년 1월 사건 접수 이후 단 한 차례도 재판을 열지 않다가 탄핵이 결정되자 슬그머니 각하한 것이다.

 한편, 지난 6월 21일 대법원은 휴일·연장근로수당의 중복가산을 불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는데, 소송이 제기된 날로부터 10년, 대법원에 사건이 올라온 날로부터 6년 6개월 만이다. 재판을 끌다가 국회가 법을 개정하자 파기환송한 것은 그동안 얼마나 ‘눈치’를 봐왔는지 짐작케 한다. 또한, 지난달 27일 대법원은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신일본제철 주식회사를 상대로 낸 사건을 전원합의체에서 논의하기로 했다고 밝혔는데, 이로써 관련 손해배상 소송의 결말이 18년 만에 나올 전망이다(대법원은 재판을 5년째 미뤄왔다). 그 밖에도 ‘석연치 않게’ 재판이 지연되는 사례가 많다.

 대한민국을 ‘법치국가’라고 부를 수 있을지조차 의심스럽다. 독일민법은 소송 지연에 대해 국가배상 의무를 인정하고, 일본도 근래에 ‘재판신속화법’을 제정했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신속한 재판을 실현하기 위해 특단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국민의 권익 보호’와 ‘정의 실현’을 위해 수고하는 많은 법관들에게 격려를 보내면서, 제발 향후에는 ‘고의로’ 재판을 지연시키는 일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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