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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시인이자 신학자인 칼릴 지브란은 "낙관주의자는 장미에서 꽃을 보고, 비관주의자는 장미에서 가시만 본다"고 했습니다. 똑같은 장미를 보고 이렇게 다른 걸 봅니다. 그러나 더 다른 점은, 낙관주의자의 곁에는 벗이 많지만 비관주의자의 곁에는 적다는 점이고, 낙관주의자와 함께 일해 본 사람들은 그와 다시 일하고 싶다고 하지만 비관주의자와 함께 했던 사람은 그와 다시는 일하고 싶지 않다고 하는 점입니다.

 "그 사람과 다시 일하고 싶습니까?"

 과연 저는 낙관주의자로 살고 있을까, 비관주의자로 살고 있을까를 생각해봅니다.

 「마음에 감동을 주는 이야기」에 나오는 우화 하나를 흥미롭게 읽은 적이 있습니다. 옛날 어느 나라의 왕에게 오랜 친구가 한 명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무슨 일이 일어나든 늘 "그것 참 잘된 일이군!"이라고 말하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왕은 그와 함께 사냥을 떠났습니다. 그가 총알을 장전한 다음 사냥총을 왕에게 주었고, 왕은 그 총을 받아들다가 실수로 방아쇠를 잡아당겨 자신의 엄지발가락에 맞추는 바람에 발가락을 잃고 말았습니다. 이것을 보고 친구는 "그것 참 잘된 일이군"이라고 말했지요. 그러자 화가 머리끝까지 난 왕은 그를 감옥에 가둬버렸습니다.

 일 년이 지난 어느 날, 혼자 사냥을 즐기던 왕이 길을 잃고 식인종이 사는 마을로 들어가 잡히고 말았습니다. 식인종들은 왕의 손발을 묶어 장작더미에 올려놓고 불을 붙이려고 하다가 왕의 엄지발가락이 없는 것을 발견합니다. 식인종들은 몸이 온전하지 않으면 먹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왕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습니다. 궁으로 돌아온 왕은 감옥에 있던 친구를 풀어주며 "네 덕에 내가 살았다"고 말하자, 친구는 또 "그것 참 잘된 일이군"이라고 합니다. 왕은 친구의 말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 물었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억울하게 옥살이를 했는데도 그게 잘된 일이라니?"

 그러자 친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잘된 일이지요. 생각해보세요. 내가 만약 감옥에 가지 않았다면 왕이 식인종에게 잡히는 순간 나도 왕 곁에 있었을 것이 아니겠소. 그렇다면 내 발가락은 멀쩡하니 내가 죽었을 겁니다. 그러니 잘된 일이지 않습니까?" 참 낙천적이지요? 저런 태도를 취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어떤 상황이라도 멋지게 극복해낼 수 있을 것이고, 그런 사람과 함께 하는 사람들 역시도 기분이 좋아질 것 같습니다.

 「코끼리여, 사슬을 끊어라」라는 책에는 배우지 못하고 변변한 직업도 없어서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살아가던 한 청년이 점을 치러 간 이야기가 나옵니다. 점쟁이는 그를 보고 나폴레옹이 환생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때부터 청년은 나폴레옹에 대해 알고 싶어 책과 자료를 구해 읽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책 속에 나오는 나폴레옹의 겉모습만 따라하는 정도이더니, 시간이 흐르자 그의 야망까지도 가슴에 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나폴레옹 흉내 내기가 지속되자, 중요한 의사결정의 순간마다 나폴레옹이 그랬던 것처럼 긍정적인 확신으로 대처하게 됐습니다. 그러자 그동안 풀리지 않던 일들이 마법처럼 풀렸습니다. 이렇게 자신감이 생긴 청년은 과거와 달리 외모까지도 환하게 빛났습니다. 세월이 꽤 흐른 어느 날, 청년은 그 당시 점쟁이를 우연히 길에서 만나 점괘에 대해 물었더니, 점쟁이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 그 말? 난 그냥 해본 말이었어!"

 점괘 때문에 자신이 바뀐 것이 아니라 청년 스스로가 자신을 바라보는 생각이 바뀐 때문에 저런 변화가 이뤄졌습니다. 힘겨운 일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힘겨운 일을 힘겹게 느끼기 때문에 불행합니다. 그래서 서양속담에 ‘다리가 부러졌다면 목이 부러지지 않은 것을 감사하라’가 있나 봅니다. 장미에서 가시가 아니라 꽃을 보며 감격하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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