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강점기인 1919년 3월 계양면 황어마을 주민들이 일장기 아래에서 강제 노역을 하고 있다.<인천시 계양구 제공>
▲ 일제강점기인 1919년 3월 계양면 황어마을 주민들이 일장기 아래에서 강제 노역을 하고 있다.<인천시 계양구 제공>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한창이던 1919년 3월 24일. 지금은 인천이 된 경기도 부천군 계양면 장기리의 한 장터에서 은밀한 움직임이 시작됐다. 장날을 맞아 북적대는 장터에서 오후 2시 한 청년이 옷 속에 숨겨 둔 태극기를 펼쳐 들었다. 이를 시작으로 장터의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 저마다 태극기를 꺼내 들며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당시 44세였던 고(故) 임창현 애국지사도 이 만세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가장 먼저 태극기를 꺼냈던 고 심혁성(당시 31세) 애국지사를 비롯해 이담, 이은선, 임성춘, 전원순, 최성옥 등과 함께 만세운동의 중추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장터는 지금의 인천시 계양구 장기동에 위치한 ‘황어 장터’다. 인천에서는 동구 창영초등학교와 함께 대표적인 만세운동 중심지로 꼽힌다.

황어 장터 만세운동에는 당시 600여 명의 주민들이 동참하는 등 인천에서 전개된 가장 큰 규모의 만세운동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만큼 일본 경찰의 진압도 거셌다. 한순간 불붙은 만세운동에 당황한 것도 잠시, 일본 경찰은 주도자로 심 지사를 체포하는 등 적극적으로 진압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심 지사 연행을 저지하려던 이은선(당시 43세) 애국지사가 일본 경찰이 휘두른 칼에 맞아 즉사했다.

임 지사를 비롯한 애국지사들과 종교인, 일반 농민들은 일제의 무력 진압 등 만행을 규탄하며 이 지사의 사망 원인규명을 촉구하고 나섰다. 주동자로 체포된 심 지사 석방을 위한 만세시위도 이어갔다. 이 만세시위는 이후 각 면으로 확산됐다.

임 지사는 이에 그치지 않고 심 지사가 최초로 연행됐던 면사무소를 부수는데 동참했다. 면사무소는 당시 주민들을 억압하고 탄압하던 친일 기관 중 하나로 기록돼 있다. 또 면사무소 서기였던 이경응이 규탄 회합에 참석하지 않는 등 친일적인 행동을 했다고 보고 그의 집도 부쉈다.

이 과정에서 임 지사는 체포됐고, 이후 면소처분을 받았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만세운동과 항일시위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임창현 지사가 올해로 꼭 99년 만에 그 공로를 인정받아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는다. 국가보훈처는 15일 ‘제73회 광복절’을 맞아 총 177명의 독립유공자를 포상하기로 했다고 13일 밝혔다. 인천시 대상자로는 임 지사를 포함해 2명이지만 이 중 인천지역에서 활동한 이는 임 지사뿐이다.

인천보훈지청의 한 관계자는 "임 지사와 같이 가족이 따로 신청하지 않아도 자체조사를 통해 발굴되는 독립유공자도 많아지고 있어 의미가 크다"며 "독립유공자들의 공로를 지속적으로 발굴해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라고 말했다.

김희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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