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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과 인천

강덕우 (사)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

기호일보 webmaster@kihoilbo.co.kr 2018년 08월 16일 목요일 제10면

강덕우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jpg
▲ 강덕우 (사)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
현재 남북을 둘러싼 미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과의 외교관계는 다변화하고 있어 마치 120년 전 동북아의 급변하는 정세 속에 힘의 균형과 견제를 떠올리게 한다. 1894년 8월 1일 일본은 중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제1차 중일전쟁이라 불리는 청일전쟁이 시작된 것인데, 이미 조선에서 청나라 주력 함대와 육군이 어느 정도 궤멸한 후였다. 전쟁은 이미 치밀하게 준비돼 있었다. 이해 5월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고 전주가 함락되자 조선 정부는 원세개에게 원병을 요청했다. 청의 북양대신 이홍장은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강화하기 위해 군함 2척을 급파하고 이어 육군 병력 2천400명을 출동시켰다. 이들은 6월 8일에서 12일 사이에 아산만에 도착했다. 일본은 청군의 파병이나 통보와 상관없이 이미 병력을 동원하고 있었다. 6월 9일 오후 2시 400여 명의 일본군이 인천 제물포에 상륙했다. 그리고 다음 날 10일 오전 4시 세차게 내리는 비를 뚫고 서울로 진격했다. 결과적으로 전쟁은 서울을 누가 먼저 선점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된 셈이었다.

 6월 하순까지 제물포에 집결한 일본 군대는 약 8천여 명에 이르렀다. 상륙한 일본 군사들은 인천 일본인 민가에 배치됐다. 각국조계 외국인들의 항의가 있자 일본은 부득이 2천여 명에 달하는 군인을 일본조계로 옮기고 나머지 1천여 명 및 군마 200여 필은 일본공원 및 공동묘지(현재의 답동)에서 노숙하게 했다. 인천에서 경인가도를 따라 부평으로 넘어가기 전인 별리고개(星峴, 성현)에도 일본 군대를 주둔시켰는데, 인천과 경성의 연락 임무를 맡겼다고는 하지만 실상은 교통의 요지를 점령한 것으로 인천 전역은 일본군의 병영이 되다시피 했다. 청·일 양국의 출병으로 양국관계가 험악하게 되자 구미 각국의 군함들도 정황 정찰과 공사관 보호를 위해 인천에 빈번히 내항했다. 영국, 독일, 프랑스, 미국, 러시아 군함 등이 입항해 있어 인천항은 이제 국제 분쟁의 중심지로서 국제적인 관심 지역이 됐다.

 7월 23일 일본군은 경복궁에 난입해 조선 왕실을 장악했다. 그리고 7월 25일 일본 해군은 풍도(風島) 앞바다에서 청국 군함과 영국 수송선 고승호(高陞號)를 격침시켰다. 이어 28일 벌어진 성환 전투에서도 청국군을 쉽게 격파했다. 그런 뒤 8월 1일에야 비로소 청국에 선전포고를 했던 것이다. 이어 조선의 내각을 친일 인사로 교체해 군국기무처를 설치하고 갑오경장을 실시했다. 이후 군수품 수송과 징발 등은 모두 조선 정부의 명령으로 일본을 위해 시행됐음은 자명한 것이었다. 이 전쟁은 1895년 4월 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함으로써 그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일본은 청나라로부터 요동반도와 대만을 할양받고, 2억 냥의 배상금을 받았다. 청나라의 배상금은 일본 자본주의가 비약적으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되었는데 중공업의 기반인 대규모 제철소가 세워졌고, 조선·철도·군수 산업의 종잣돈이 됐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조선에서 청의 세력을 축출함으로써 대륙으로의 진출을 위한 발판을 놓았다는 것이 가장 큰 성과였다.

 청일전쟁을 계기로 월미도는 일본의 군수기지로 변했고 인천은 물자보급기지로서의 중요성이 더한층 부각됐다. 일본군은 인천에 남부병참기지를 설치하고 이의 경비를 위해 인천병참수비대를 조직·배치시켰다. 이는 후에 인천병참사령부로 확대됐고 1896년 5월까지 계속 인천에 주둔했다. 일본군이 점령한 제물포의 중국인 거리는 중세의 페스트 지역만큼이나 절망적이었다고 한다. 청일전쟁 전 2천500명을 넘지 못하던 일본인 수는 전쟁 후에 4천 명 이상으로 증가했기 때문에 일본조계지는 포화상태에 이르렀다. 이 같은 인구 팽창으로 인해 이들은 빠르게 조선인 마을 및 각국조계로 유입해 들어갔다. 조계지 확장은 필연적이었다. 청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인은 인천지역에서 완전한 우세를 확보했다. 인천의 일본인들은 조선의 인천을 ‘우리의 인천’이라고 했다. 청국과 일본의 각축은 식민지 조선으로 가는 서막이었고, 인천의 시련이 본격화된 전쟁이었다. 120여 년 전 역사의 자취를 8월의 삼복더위 속에 되새겨 본다.

  ▣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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