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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가족 언제나 만날까… 그리움 안고 끝내 돌아가신 어머니

안타까움 교차하는 제21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

김희연 기자 khy@kihoilbo.co.kr 2018년 08월 20일 월요일 제19면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셨겠지만 세 명의 동생들이 지금 살아있다면 70대 노인이 됐을텐데 잘 살고 있는 지 생사(生死)라도 알고 싶은 마음 뿐입니다."

‘제21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시작됐다. 2015년 10월 금강산에서 열린 ‘제20차 이산가족 상봉’ 이후 2년 10개월 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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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해도 옹진군 동강면 출신 실향민 김옥순(81) 할머니는 고령의 이산가족들을 위해 상봉 기회를 더 확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옥순(81) 할머니는 이번 이산가족 상봉 행사에 초대받지 못했다. 60여 년간 그리워했던 가족을 만나고 싶어 이산가족 상봉을 애타게 기다렸지만 최종 상봉자 명단에서 제외된 것이 벌써 여러 차례다.

김 할머니의 고향은 황해도 옹진군 동강면의 ‘중고잔 마을’이다. ‘곶(串) 안에 형성된 마을’이라는 뜻을 가진 이 지역에는 50여 가구가 모여 살았다. 일찍이 조강지처와 사별하고 재취(再娶)한 아버지와 새어머니, 3명의 동생과 함께 살던 김 할머니는 한국전쟁 발발 이후 가족과 함께 해주만(海州灣)의 한 섬인 소수압도(小睡鴨島)로 피난해 살았다.

그 곳에서 김 할머니의 아버지는 전염병에 걸려 이내 세상을 떠났다. 지아비 없이 홀로 자식들을 건사하던 새어머니는 동생들과 함께 서둘러 고향집이 있는 옹진으로 건너갔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새어머니와 동생들이 고향으로 돌아간 뒤, 배 편을 구하던 김 할머니는 휴전 소식을 들었다.

뒷 동산에 올라 멀리 해주 시내와 드넓은 연백 평야를 바라봤던 그 고향 마을은 더 이상 갈 수 없는 땅이 돼버렸다. 그 후 60여 년이 흐르는 동안 그리운 가족들의 모습은 기억 저 편으로 잊혀져 갔다. 이제는 꿈 속에서조차 가족들 얼굴이 가물가물하다.

실낱 같은 희망의 끈을 부여잡고 이산가족 상봉 신청의 문을 여러 차례 두드렸으나, 단 한 번도 그 대열에 합류하지 못했다.

김 할머니는 "처음 상봉자 명단에서 탈락했을 때는 다시 기회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며 "높은 경쟁률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은 상봉자 수를 보고 나서는 더 이상 기대 하지도 않았다"고 털어놨다.

김 할머니는 고령의 실향민을 위해 이산가족 상봉 기회를 더 확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점점 세상을 떠나는 실향민에 비해 상봉의 기회나 규모가 적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끝내 가족을 만나보지 못하고 떠나간 많은 실향민들의 한(恨)이 얼마나 크겠느냐"며 "하루 빨리 많은 실향민들이 다시 만날 수 있도록 정부 차원에서 노력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우제성 기자 wjs@kihoilbo.co.kr


"생전에 어머니는 북에 있을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항상 가슴 속에 담고 사셨어요. 처음 만나게 될 이모에게 어머니의 이러한 마음과 기억을 모두 전해드릴 수 있을지 걱정이지만, 되도록 많은 얘기를 해드리고 오겠습니다."

‘제21차 남북이산가족 상봉행사’ 상봉단으로 북한을 찾게 된 김향미(52·여) 씨는 이모를 만나게 됐다는 소식을 들은 순간부터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자리에 눕기만 하면 언젠가 어머니가 가족에 대해 했던 얘기들을 곱씹느라 생각이 많아져서다. 조만간 만나게 될 이모 신남섭(81) 씨에게 하나라도 더 많은 기억을 전해주고자 하는 마음이다.

김 씨의 모친인 故 신경자(아명 신중섭) 씨는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재개되던 2000년 8월 끝내 다시 만나지 못한 아버지와 언니를 마음에 묻은 채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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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향미 씨가 이모 신남섭 씨의 초등학교 졸업앨범과 상장을 펼쳐보고 있다. 이 졸업장과 상장은 김 씨의 모친이자 신 씨의 동생인 故신경자 씨가 피란길에 챙겨둔 것들이다.
"어머니는 항상 가족을 그리워하면서도 그 감정을 입 밖으로 내면 기억들이 쏟아져 참기 힘들어진다고 생각하셨는지 꾹꾹 눌러 담으셨어요. 어머니가 사무치는 감정을 내비치셨던 건 상봉이 무산됐을 때와 돌아가시던 순간 뿐이었죠."

신경자 씨는 한국전쟁이 일어나던 1950년 6월 아버지, 언니와 헤어졌다. 당시 아버지는 장녀인 신남섭 씨만 남기고 가족을 모두 고향인 충청도로 내려 보냈다. 남은 일만 마무리하고 금방 따라갈 거라고 약속했다. 며칠이면 다시 만날 줄 알고 헤어졌던 게 그렇게 68년이 흘렀다.

언니 신남섭 씨는 중학교에 우등생으로 입학하는 등 집안의 자랑이었다. 피란 중에도 신경자 씨가 책가방에 챙겼던 물건은 바로 언니의 졸업 앨범과 졸업장, 우등 상장 등이었다. 언젠가 다시 만나 전해주겠노라 다짐하며 수없이 펼쳐보느라 누런 종이는 헤진 지 오래다. 보물처럼 간직해 온 졸업장 등은 김 씨가 대신 전해줄 예정이다.

김향미 씨는 "이모는 여동생과 남동생을 찾고자 신청했지만 이미 어머니와 삼촌이 모두 돌아가신 상황이라 조카들이라도 보고 싶다고 연락해왔다"며 "어머니가 ‘지금까지 졸업장을 갖고 있었다’고 자랑하면서 전해줬다면 좋았겠지만, 너무 늦어 그러지 못한 것이 제일 안타깝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김향미 씨는 18년 전 돌아가신 후 사진이나 영상으로만 보던 어머니의 모습을 이모에게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울컥하곤 했다.

김희연 기자 khy@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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