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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채훈 [삼국지리더십연구소 소장/역사소설가]
표현에는 숨겨진 개념이 있다. 예를 들어 패권주의(覇權主義 : Hegemoism)라고 하면 냉전시대의 용어로 대국이 소국을 일방적으로 억압하고 위세를 과시하는 걸 의미한다. 제국주의와 상통한다. 최근 중국에서는 미국의 무역 행태에 대해 패권주의 대신 패릉주의(覇凌主義 : Trade Bullying)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패릉’ 중국어의 ‘바링’은 우리말로 ‘왕따’, ‘괴롭힘’, ‘따돌림’이라는 의미다. 영어 단어 ‘bullying’의 발음에 뜻이 맞는 한자를 사용한 원산지는 타이완이고 정말로 낯선 단어다. 미국이 340억 달러 관세 부과를 발표했을 때 ‘인민일보’는 "미국의 무역 패릉주의가 전 세계에 해를 끼친다"고 했다. 무역 패권주의라고 하면 가해하는 쪽의 입장을 부각시키는 것인데 무역 패릉주의라고 하면 당하는 쪽의 아픔·수치·당혹·공포를 담아낸다.

 개고기 금지를 위해 발의된 ‘동물보호법 개정안’도 실제는 ‘동물차별법 개정안’이라는 의견이 많다. 개와 다른 동물을 차별하는 것이란 주장이다. 우선 개고기 식용은 문명과 야만의 문제처럼 부각되고 있으나 간단히 말해 문화다양성의 문제일 뿐이라는 것.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의 말대로 문명과 야만의 구분은 서구적 가치가 인류 보편의 가치일 수 없으며, 서구의 오만과 편견에 불과한데 우리의 개고기 식용 문화를 마치 야만으로 단정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보편적 동물복지’라는 표현도 그렇다. 개고기 식용을 금하는 것이 모든 동물을 위한 것이라고……. 동물 복지 선진국은 모두 세계적인 육류 소비국이자 수출국이다. 개는 마치 친근한 이웃처럼 가족처럼 애지중지하면서도 개고기 식용국보다 수백 배 많은 동물을 죽이는 일은 당연시하는 태도일 뿐 결코 보호나 복지 개념이 아니라 대량 사육과 도축을 정당화히기 위한 궤변(?).

 도시 공유(共有)라는 표현도 따져볼 필요가 있다. ‘도시란 국가가 갖는 것(公有)이 아니라 일반 시민과 함께 갖는 것’이란 뜻에서 ‘共有’를 쓰고 있는데 이는 ‘나눔’을 뜻하는 영어 단어 ‘sharing’를 옮긴 것. 공유경제(共有經濟 : sharing economy)라고 하면 따뜻하고 아름다운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공유경제의 화신처럼 말해지는 우버(uber)가 기사들을 쥐어짜서 착취를 일삼는다거나 에어비앤비(Air BnB)가 도심 거주지를 상업화해서 이른바 젠트리피케이션(고급 주택가를 조성해 원주민을 쫓아내는 현상)을 야기한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중국에서 ‘sharing’을 분향(分享 )으로 번역한다. 나눠서 누리기. ‘有’라는 탐욕 가득한 언어 대신에 ‘享’이란 채움이 아니라 비움의 언어를 쓴 것이다. 중국에서 외래어 번역에는 원칙이 있다. 먼저 뜻이 비슷한 기존의 어휘를 찾는다. 없을 경우에는 뜻을 풀어 의역한다. 음역(音譯)은 의역까지 안 될 경우다. 우리가 ‘commoning’을 공유, 공동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중국은 ‘공향(共享)’이라고 옮긴다. 함께 누리기다. 한자의 뜻을 모르게 된 지 오래된 상황을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답답하다.

 권력을 이용해 자신의 비서에게 성폭력을 가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안희정 전 충남지사에 대한 1심 재판에서 재판장은 "안 전 지사가 유력 정치인이고 차기 유력 대권주자로 거명되고 있는 지위 및 도지사로서 별정직 공무원인 피해자의 임면 등 권한을 가지고 있는 점을 본다면 위력에 해당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면서도 "안 전 지사가 위력을 행사한 사정은 보이지 않는다"고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가 피해자를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가해자의 행위에 초점을 맞추지 않은 사건도 그렇다. ‘전후 체제로부터의 탈각’(일본 아베 총리가 헌법 개정을 주장하며 내건 구호)은 어떤가? 우리가 광복절이라고 부르지만 일본인들은 태평양에서 벌인 전쟁에서 패배한 걸 인정한 날이라고 한다. 틀린 건 아니지만 적확한 이해가 결코 아니려니와 그들 일본제국주의가 행한 수많은 악행과 죄악에 대한 성찰이나 반성 자체가 결여돼 있다. 한반도 평화체제와 북한의 비핵화도 통일 선상에 놓여 있지만 같은 표현은 아니다. 부정적 혐오를 긍정적 분노로 재조정할 때다.

▣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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