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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덕우 <(사)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
건국절에 대한 논란이 일었다. 이름자 그대로 국가의 정통성을 기념하자는 것인데 왜 이리 시끄러워야만 하는지 의문이다. 우리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자는 것에 누가 이의를 제기하겠느냐만은, 우리에게는 모두가 소중한 자산을 두고 그것의 우열을 가리자고 하는 것 같아 심히 우려가 된다.

 매사 출발점에서부터 결과도 예측해야 하는 혜안이 필요하고, 새로운 것을 시도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다시 한 번 실감해야 한다.

 일제강점기 일본의 무단적 식민지 정책이 강행되면서 한국인의 반일·항일 감정은 날로 높아만 갔고, 그것은 점차 조직적 집단적 저항·투쟁을 도모하게 했다. 3·1독립만세운동은 이러한 운동 양태를 표출시키는 하나의 전기가 됐고 국외에서나마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돼 독립운동의 구심체가 뚜렷하게 형성됐다.

 임시정부와 광복군(光復軍)이 외교적으로 또는 무력적으로 광복을 위한 투쟁을 벌이는 동안, 국내에서는 이들과 연계해 일본의 지배를 약화시키고 우리 민족의 실력을 배양하려는 다양한 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됐다.

 1919년 3월 6일 원인천에서 시작해 부평·김포·강화 등으로 확산되며 한 달 넘게 독립만세를 불렀던 인천 지역사회에서는 그 기운을 이어 수많은 조직이 결성되고 다양한 활동이 전개됐다. 개항 후 전통적으로 강세를 보여 온 노동운동과 청소년운동은 그 중심에 있었다. 1920년대 초에 전국적으로 전개된 조선물산장려운동과 금주(禁酒)·단연(斷煙)운동이 인천조선물산소비조합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또 전국적 민족운동 조직인 신간회와 근우회의 인천지회가 조직됐다.

 광복에 이르기까지 합법적 또는 비합법적으로 저항과 투쟁을 지속해 간 것은 노동운동과 청소년운동이었고 일본의 식민지배 말기에 전개된 다양한 한민족 말살정책에도 불구하고 한민족을, 우리 인천지역 주민을 광복에 이르도록 했던 원동력이었다.

 1945년 8월 15일 정오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알리는 일왕(日王)의 목소리가 라디오 방송을 통해 들리면서, 한국인들은 광복의 기쁨에 거리로 쏟아져 나와 환희의 물결을 이뤘다. 우리 민족은 36년간에 걸친 일제의 식민통치로부터 ‘해방’됐고, 광복은 소수 친일 민족반역자를 제외한 한민족 성원 모두의 감격이었다.

 일본인들은 그들이 저질러온 만행으로 불안과 공포에 휩싸였고, 자신들의 안전한 귀국을 위해 세화회(世話會)를 조직해 잔류 일본인들의 단합을 꾀하는 한편 전쟁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재향군인들을 무장시켜 순사 복장으로 각 파출소를 경비하는 등 한국인들의 응징에 대비했다. 인천에서도 일본인들은 인천세화회를 조직하고 신변 안정과 본국 귀환활동을 전개했다.

 인천은 일본인들이 항복을 앞두고 한국을 탈출하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다른 어느 지역보다 광복의 예감이 빨랐고, 식민지 근대화의 첨병 역할을 하던 전진기지였기 때문에 광복을 맞는 표정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미군이 아직 진주하지 않은 권력의 공백 상태에서 치안은 가장 절실한 문제였다. 그러나 광복과 함께 인천은 또다시 시련과 혼란이 도래했다. 인천은 수도 서울의 관문이라는 중요성과 함께 교통도 원활한 지역이었으므로 다른 지역보다 먼저 미군이 진주해 군정(軍政)이 실시됐고, 그 와중에 좌·우익의 경쟁적 정치 세력화는 인천 사회의 혼란을 더욱 가중시켰다.

 특히 인천지역에는 일본 제국주의의 전쟁 수행을 위한 군수공장이 많았고 일본인 경영자들이 산업계를 지배하는 등 일제 식민지 지배의 전초기지가 돼 있었기에 광복에 따른 혼란은 다른 어느 지역보다 더할 수밖에 없었다. 나아가 인천 경제도 일본이 남겨 놓고 간 공장과 시설에 많이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실정이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경제를 지향한다는 국민적 합의가 이뤄지면서 인천 지역사회는 빠르게 안정돼 갔다. 일제 잔재와 미군정의 과도기적 조치들이 하나하나 청산되고 일신돼 갔음은 물론이다.

 그로부터 70여 년이 흐른 지금 인천 사회는 인구 300만을 넘는 거대도시로 재탄생했고 주민에 의한, 주민을 위한 행정이 진행되고 있다. 과거의 사실은 새롭게 기억되기도 하고 잊혀지기도 하지만 모두가 반면교사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모두의 목표는 언제나 새로워지는 인천이기 때문이다.

▣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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