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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훈 겨레문화연구소 이사장
20년이 넘도록 ‘담장 허물기 시민운동 사업’을 지속해 온 한 지자체가 올해도 예산을 편성해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그동안 관공서, 주택과 아파트, 상업시설, 종교시설, 의료시설, 그리고 학교와 기업체 등 총 943개소, 32.1㎞의 담장을 허물고 36만8천260㎡의 가로공원을 조성했다고 한다.

 높은 담장을 허물어 버리니 이웃 간 소통은 물론 함께하는 마을공동체 문화가 만들어지고 도심 곳곳에 녹지가 대폭 늘어나는 등 긍정적인 효과가 커서 해마다 시민들의 참여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업은 한때 서울을 비롯해 부산, 인천, 광주, 대전, 울산 등 여러 지자체들이 벤치마킹할 만큼 큰 주목을 받았다.

 처음에는 전국 곳곳에서 아파트와 단독주택, 학교, 종교시설, 기업체, 병원 등에 수억 원씩을 지원해 담장을 허물고 나무를 심는 등 큰 성과를 올리는 듯 보였다. 그러나 모든 일이 그러하듯이 섣부르게 시작하다 보니 일부에서는 담장을 허문 곳에 다시 담장을 쌓고 있는 곳이 나타나는 등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 학교의 예만 보더라도 몇 년 전 지자체 예산을 지원 받아 학교 담장을 모두 철거하고, 그 공간을 녹지공간으로 조성했으나 관리자가 바뀌자 녹지 공간을 없애고 다시 담장을 쌓아버렸다는 것이다.

 담장이 없다 보니 보안에도 문제가 있고 학생들이 찬 공이 도로로 굴러 나가 사고위험이 높다는 이유에서다. 담장을 허물고 나면 나타날 문제점을 충분히 검토하지 않고 담장을 허물었다가 결국 이중으로 예산을 낭비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본질은 다른데 있는 것 같다.

 그것은 ‘담장이 없으면 문제가 많다’ 라는 고정관념(固定觀念)이 마음속에 여전히 높고 두꺼운 벽을 쌓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고장의 한 국회의원이 지난해 ‘국회 담장 허물기 촉구결의안’을 대표 발의한 일이 있다. 결의안에는 국회의 담장을 허물어 국민과의 물리적·심리적 거리를 줄이자는 내용이 담겨 있다. 국회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여전히 높은 상황에서 국민과의 심리적 거리감을 크게 만드는 요인 중의 하나가 바로 국회 담장이라는 것이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 여러 나라들의 경우 담장 없는 의사당 건물 주변에서 시민들이 자유롭게 거닐며 쉬는 장면을 보면 우리도 그렇게 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실제로 국회가 담장을 허물지는 앞으로 지켜볼 일이지만 그런다고 국민들의 마음속에 있는 국회와 국회의원에 대한 높은 불신의 벽이 쉽게 무너질 수는 있을까?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주변에는 넓은 공터가 많다. 앞으로 학교가 들어 올 예정이라느니 도서관이 들어설 것이라느니 주민들의 설왕설래가 이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비어 있다.

 수년간 아무 것도 안하고 방치되다 보니 잡초가 무성하고 누가 내다 버렸는지 쓰레기들만 쌓여 갔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한 사람 두 사람 공터를 드나들며 쓰레기를 치우고 잡초를 뽑고 밭을 일구어 상추와 쑥갓, 고추, 토마토 등 채소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조석으로 물을 길어 나르며 각종 채소를 가꾸는 사람들의 모습이 신기하고 놀랍기까지 했다.

 대부분 나이가 지긋한 사람들인 것으로 보아 짐작컨대 언제 무엇이 들어설지 알 수도 없는 빈 땅에 작은 밭을 일궈 채소라도 가꾸는 즐거운 소일거리를 찾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드나들며 가꾸던 작은 채마밭 주변, 아니 수만㎡도 족히 넘을 그 빈 땅 주변에 어느 날 갑자기 어른 키보다도 더 높은 철제 담장이 들어섰다.

 퍽 튼튼해 보이는 담장의 구조나 모양으로 보아 적지 않은 예산으로 세웠을 테니 사람들이 드나드는 것을 막을 요량으로 당분간만 임시로 세운 것은 아닐 것이다.

 공영 개발이 예정된 땅이겠지만 그때까지만이라도 그냥 둘 수는 없었을까?

 그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두말할 나위 없이 시민들과의 사이에 높고 두꺼운 벽이 가로막혀 있는 것이 분명하다. 시민들이 납부한 혈세로 높은 담장을 만들어 그들의 작은 행복을 가로막는 일을 거침없이 해버리는 모습을 보면서 느낀 생각이다. 잠시만 주위를 둘러봐도 이와 유사한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수없이 벌어지고 있다.

 모름지기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누구나 내 안의 높은 벽부터 허물어 버리고 이웃을 생각했으면 좋겠다. 특히 부끄러움도 모르고 국민 편 가르기를 일삼는 소위 사회지도층 인사들이나 시민들의 공복인 공직자들이 더욱 명심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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