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림 인천대 외래교수.jpg
▲ 김호림 칼럼니스트
최근 북한에서는 ‘비핵화’ 문제와 관련해 경제제재의 숨통을 트기 위해, 남쪽을 향해 ‘우리민족끼리’의 ‘민족공조’를 띄우고 있다. 그들이 말하는 민족은 무엇이며, 민족공조로 무엇을 하자는 것일까?

 민족이란 말은 18세기 후반 ‘국민국가’(Nation State)성립 이후 나왔다. 근대적 의미의 민족주의는 계몽주의 사상인 공동체의 자결원칙과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기본으로 하는 자유주의사상이 한 축이 됐고, 프랑스혁명 이후 평등한 시민중심의 시민적 민족주의가 다른 축이 돼 태동하게 됐다. 이에 반해 수많은 소국가로 분할된 후발 국가였던 독일은 나폴레옹의 침략에 저항해 프랑스와는 달리 정치적 정체성보다는 역사, 전통과 문화를 중요시하는 ‘국민(Volk)사상’을 근간으로 ‘낭만적 민족주의’를 출현시켰다.

 한편 일제강점기에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에 전파된 민족주의는 다분히 낭만적 민족주의로서 분단 이후 지금까지 한국인의 의식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이는 사상이나 이념은 언어로 표현된 상징이며, 사람들은 그 상징에 포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구한말 일본인이 서양에서 발생한 Nation과 Nationalism의 개념을, 개인의 자유와 평등과 민주주의적 요소를 내포한 ‘국민’으로 표현하는 대신에, 종족을 강조하는 감성적 어휘인 ‘민족’이라고 번역한 것은 우리에게 불행한 일이었다. 사실 그 당시 우리에게는 민족이란 말 자체가 없었다. 왕조시대에는 우리의 신분은 신민과 백성에 지나지 않았다. 즉 ‘민족(종족)’이란 말은 권리 주체 이전의 존재이며, ‘국민’은 권리주체의 존재를 말한다. 따라서 혈연적 혹은 문화적 공동체만을 기반으로 하는 민족과 민족주의는 대내외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킬 수가 있다.

 극단적 민족주의를 기치로 국민을 선동한 이탈리아의 파시즘정권, 독일의 히틀러정권, 일본의 천황 군국주의와 북한의 김일성 체제는 침략전쟁의 뇌관이 됐고, 국내적으로는 독재정치 강화의 명분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다행이 1948년의 대한민국 건국은 신채호의 ‘낭만적 민족사관’을 승화시킨 이승만의 ‘시민적 건국사관’에 따라, 근대국가의 통치 명분의 주체인 국민이 주권을 가진 나라로 세우게 된 것이다.

 그러면 북한이 말하는 민족과 민족주의는 무엇을 뜻하나? 먼저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라는 물음인 도덕철학에서, 김일성 유일사상은 ‘인간성의 본질은 민족 됨에 있다’고 규정한다. 그런데 그 민족 기원과 ‘민족 됨’이 문제다. 북한의 고고학연구소는 조선인은 조선반도에서 거주하던 특이한 호모사피엔스 서브-종(亞種)인 호모 일렉투스를 기원으로 한다는 본토기원설을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민족 됨’을 근거로 해 조선인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말하는 정치철학은 명료하다. 즉 조선인은 노동계급이 주도하는 반자유민주주의적인 민족해방투쟁을 통해 자신을 헌신해야 하는 운명을 타고 났을 뿐 아니라, 백두혈통인 김 씨 왕조가 내려주는 사회·정치적 생명으로 살아가야 하며, 이것만이 북한주민의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고 인민을 세뇌시킨다. 이는 마치 민족주의라는 이념에 맞추기 위한 구성물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를 연상시키며, 이러한 ‘상상의 질서’를 주민들에게 폭압으로 강요하고 있다.

 어느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어떤 동맹도 민족을 우선 할 수 없다’라는 민족지상주의를 선언했다. 북한의 기만과 선동 앞에서 국가지도자의 이러한 낭만적 선언 이후, 그 다음 정부는 햇볕정책과 평화번영정책이라는 이름으로 국민들에게 민족공동체와 평화의 환상을 심어줬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주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 ‘북한의 비핵화’가 ‘한반도 비핵화’와 그 개념이 다르듯이, 저들이 주장하는 민족과 우리가 말하는 민족은 다른 실체임을 깨달아야 한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 위에 민족이 있다는 저들의 ‘상상의 공동체와 그 질서’를 순수한 이상으로 여길 뿐 아니라, 더 나아가 민족이 전제된다면 어떤 형태의 통일도 용납된다는 것은 환상이고 우리에게 재앙이 된다는 것을 많은 전문가들이 경고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에게 북한 동포는 70년 질곡의 상태에서 해방돼야 할 대상이다. 더욱이 세계가 하나의 시장으로 전환하는 전 지구적 경제 환경과 강대국들의 냉혹한 국제정치의 패권질서 정글 속에서 ‘우리민족끼리’만으로는 생존할 수 없음이 자명한 사실임을 기억해야 한다.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