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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락기 시조시인
적도 지역보다 더 뜨거운 여름을 보내고 올 가을을 맞는다. 스무 해째 발코니를 지키는 구아버 나무는 아열대 식물임에도 열매가 작년에 비해 잘다. 이뿐만이 아니다. 해마다 발코니 외곽 화분에 피던 까마중 열매는 맺지도 못한 채 겨우 줄기만 빳빳이 살아 있다. 그래 살아있는 것도 다행이지만 씨를 맺지 못했으니 1년생 잡초가 내년에 다시 연명할 수나 있을지 안타깝다. 씨받을 필요도 없이 절로 맺어 자라나곤 했던 까마중 푸나무. 그간 잡초라고 하여 죽든 말든 관심이 없었다. 아니 관심을 가질 여건이 안 되었다고 해야겠다. 해가 바뀌면 나도 저도 살아남아 무시로 만나 무언의 대화를 해왔다. 마치 곁에 있는지 없는지 별로 의식하지 못하고 함께 살아가는 식구처럼 말이다. 나는 매년 백로(白露)를 지난 이맘때쯤이면 까아만 까마중 열매를 따 먹으며 속을 달랬다. 그것도 대도시 안에서다. 올해 도회지 변두리 텃밭에 자라게 둔 까마중은 비록 열매는 맺혔지만 왜 그리 벌레가 많은지 따먹기 힘들었다. 말이 벌레지, 그들도 올 폭염에 먹고 살 것이나 있었는지 괜한 걱정을 해본다.

"개멀구를 따먹으며 허기를 달랜다/ 배 앓을 때 쓰다듬던 할매의 약손처럼/ 유년기 흙담 향기가 뇌리를 적신다/ 서울 바닥 고층 아파트 발코니 화분에/ 반세기가 훌쩍 넘도록 따라와설랑/ 절로 씨앗을 틔운 까마중 푸나무/ 까만 개멀구 서너 알 따서 깨물 적/ 혀끝에 감도는 달차근한 맛/ 가난하였으되 따스했던/ 따스했던, 그 시절 눈물을 먹는다." 여기 개멀구는 까마중의 방언이요, 할매는 할머니의 방언이다. 나의 자유시집 「황홀한 적막」에 있는 ‘개멀구를 따먹으며’라는 작품이다. 1960년대 간난했던 어릴 적 기억을 더듬으며, 수도권 한 가운데서 봄여름 반가이 맞아 물을 주면 정을 받고, 커가면서 함께했던 잡초 친구 까마중이다. 인터넷을 쳐보면 한국의 블루베리라 일컬어지는 까마중은 거의 만병통치약처럼 소개된다. 항암·해열·이뇨작용, 노화방지, 불면개선, 폐기능 보호 따위에 효능이 있는 한해살이풀이란다. 요즘은 약초로 재배돼 판매되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홀로 자생하는 야생성이 그 본령이라 하겠다. 잡초 그 자체다. 누가 재배하던 식물이 아니었다.

예전의 하층민이요 민초이며, 이즈음 피로와 고뇌 속에 살아가는 서민 계층과 비슷하다면 무리한 비유일까. 우리네 이웃인 서민들이 그저 별 어려움 없이 먹고 살 수 있다면 괜찮은 나라랄 수 있겠다. 작금 국회에서는 새 헌법재판관과 장관 후보자 청문회가 열리고 있다. 이제라도 고위공직자 임용배제 기준에 따른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탈세다, 다운계약서다, 병역기피다, 논문표절이다 하여 다시 듣고 싶지 않을 정도로 시청자를 식상케 한다. 더구나 국가 최상위법인 헌법 위배사항을 다룰 막중한 자리가 헌법재판관이다. 거기에 앉을 후보자가 7,8번의 위장전입을 하고서도, 자녀교육을 위해 그의 모친이 한 일이라고 버젓이 말하는 모습은 차마 더 볼 수가 없었다. 법과 질서에 따라 바르게 살아야 한다고 자녀를 가르쳐온 대다수의 국민들이 잘못된 것인가. 자신의 위법사실에 대해 구차한 핑계만 대는 그런 후보자는 법을 빙자 내지 악용하는 법률기술자일 뿐이다.

맹자가 한탄한다. 몰염치의 극치이다. 이런 경우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멀어도 한참 멀었다. 실업자가 110만 명이 넘어서고 청년실업률이 최악이라고 보도되는 현실이다. 일자리를 잃어버린 서민들이 울고 있다. 요 며칠 평양에서는 남북정상회담이 한창이다. 북한의 비핵화를 통해 장래 평화적인 조국 통일의 기반을 닦는 일은 중차대한 일이다. 이에 못지않게 남한의 보수와 진보의 화합도 필요하다. 특히 서민 대중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아픈 배를 쓰다듬어주는 약손이 더없이 필요하다.

머잖은 날, 까마중 씨알이 다시 날아와 곁에서 자라는 모습을 보고 싶다. 쓰린 속을 풀어주는 그 까마중 열매를 먹고 싶다. 지금 평양의 서민아파트 화분에도 까마중이 자라는지. 거기도 까마중이 까맣게 잘 익어 서민의 배고픔을 달래주기 바란다. 다가오는 한가윗날,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잠시나마 행복한 한때를 보내시길 빌면서 까마중이 전하는 단시조 한 수로 끝맺는다.


<까마중의 비원>

여름도 여름 나름
올여름은 아닐 거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여름다운 날이 오면

탱글이
맺힐 그 열매
누구인들 못 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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