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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인천상륙작전

강덕우 (사)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

기호일보 webmaster@kihoilbo.co.kr 2018년 09월 20일 목요일 제10면

강덕우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jpg
▲ 강덕우 (사)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
9·15 인천상륙작전의 유명세에 기인하는 것이겠지만, 1951년에 전개된 제2차 인천상륙작전은 1·4후퇴로만 인식됐고 인천의 역사에서조차 생소한 실정이다. 인천상륙작전은 분명 한국전쟁의 전세를 뒤엎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유엔군의 북진(北進)에 불안을 느낀 중공의 참전을 예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1950년 10월 25일 중공군은 압록강 도하작전을 개시했다. 청천강 인근에서 중공군과 첫 전투를 벌인 후 국군과 유엔군은 후퇴를 거듭했다. 개성을 점령하고 임진강을 넘은 북한군 제1군단은 1951년 1월 4일 서울에 침입해 한강을 도하하고, 1월 5일 북한군과 중공군 각 1개 대대 700명의 병력이 인천시를 점거했다. 그리고 월미도에 야포(野砲) 8문과 박격포, 중기관총 등으로 견고한 포대를 구축했으며 전차 1대까지 배치했다. 중공군이 인천에 진입하자 유엔군은 인천항의 항만시설을 폭파하고 인천에서 철수했다.

 시민들 또한 극심한 혹한 속에서 피난길이 시작됐다. 37도선에서 중공군과 대치하고,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는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전이 개시됐다. 1951년 1월 15일 오산에서 수원까지 진출한 이래 유엔군은 군포, 안양, 수리산, 청계산 및 관악산 일대까지 진출했다. 중공군은 2월 6일 주력을 한강 이북으로 철수시키는 한편, 관악산에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서울방어를 위해 인천에 주둔하고 있던 북한군까지 관악산으로 이동해야만 했을 만큼 치열했다. 중공군이 개입한 이후에도 유엔해군과 한국해군은 해양 통제권을 계속 장악하고 있었고, 한국 해군은 인천 팔미도, 무의도, 영흥도, 덕적도, 연평도 일대의 해역(海域)을 봉쇄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우리 해군은 미 해군으로부터 인천지역의 정보를 요청받음에 따라 1월 27일 인천항에 특공대를 침투, 북한군·중공군 각 1명을 생포한 뒤 귀환했다.

 미 해군은 이들로부터 중공군 주력부대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 관악산 일대에서 한창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 즈음 해군 701호 백두산함 함장 노명호 소령과 덕적도 주둔부대장 김종기 소령은 한강 진출의 마지막 관문인 관악산을 점령하기 위해서는 적의 배후를 흔들 수 있는 교두보 확보가 절실하다고 판단, 미 극동군 해군사령관에게 인천지역에 ‘위장’ 상륙작전을 요청했다. 이에 2월 10일 오후 6시 덕적도 주둔 한국 해군·해병 1개 중대를 인천 만석동의 인천기계제작소에 상륙시킨다는 계획을 세웠다. 노명호 소령은 인천상고 출신으로 이곳의 지리에 정통했고, 중공군이 서울로 후퇴 중이며 사기 역시 크게 동요를 일으키고 있다는 정보도 이미 수집했다. 유엔해군과 한국해군의 맹렬한 함포사격과 함께 수행된 상륙작전은, 작전에 투입된 병력은 고작 170명에 불과했지만 마치 대부대가 상륙하는 것처럼 위장됐고, 적 역시 우리의 대부대가 상륙한 것으로 착각하고 이미 퇴거했다.

 당시의 정황으로 볼 때 부천 소사지역까지 진출한 유엔군과 인천상륙부대 사이에 포위될 것을 두려워해 신속 후퇴한 것으로도 분석되기도 한다. 밤 11시께에는 인천시청까지 점령해 본부를 설치했다. 다음 날 2월 11일 오전 특공대는 인천 시내 잔적을 소탕하고 월미도로 진격했다. 저항은 없었다. 이들은 남쪽 능선에서 야포 8문을, 동남쪽 중턱에서는 고장난 전차(戰車) 한 대를 노획했다. 마침내 위장작전을 목적으로 인천에 상륙했던 소규모 부대가 아예 인천시 전체를 탈환해 버린 것이었다. 인천항은 곧 복구작업이 시작됐고, 부산항과 같은 적당한 항구가 없었던 상태애서 인천의 재탈환은 지상군의 군수물자 지원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이 작전은 그해 3월 15일 유엔군이 서울을 재탈환하는 데 큰 도움이 됐음은 물론이다. 인천은 명실상부 한반도의 관문이다. 바다를 통해 최초로 중국과 통교한 곳으로도, 고려후기 몽고에 의해 개경이 함락될 때 제2의 수도로도 삼았던 구국의 성지였다. 남과 북이 공존해야 하는 현재의 입장에서도 인천의 지정학적 위치는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다. 서해바다는 인천의 미래이다. 인천의 역사적 역할을 통해 시대적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때가 지금이 아닌가 생각된다.

▣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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