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0년 북한의 연평도 포격으로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민간인 희생자가 나왔다.
▲ 2010년 북한의 연평도 포격으로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민간인 희생자가 나왔다.
인천에는 민족 상잔의 혈흔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다행히 이번 평양공동선언으로 65년 분단의 아픔은 인천에서 새로운 희망으로 아물게 됐다.

남북이 18~20일 제3차 정상회담에서 체결한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군사 분야 합의서’는 육지와 하늘, 바다에서 일체의 무력사용을 금지하는 내용이 담겨 사실상 불가침 선언이다. 특히 지상과 해상, 공중에서 적대행위를 막는 완충지대를 설정한 것은 분단 이후 처음으로 우발적 충돌을 막는 데 큰 효과를 발휘할 것으로 전망된다. 인천을 분단의 아픔으로 처음 물들인 것은 ‘인천상륙작전’이다.

지난 5일 인천시장 집무실 앞에서 월미도 원주민이 울고 있었다. 한인덕(74) 월미도귀향대책위원장이 시장을 만나고 싶다며 절규했다. 한 위원장을 비롯한 만석동 79 일대에 살던 주민들은 1950년 9월 10일 융단폭격, 잇따라 터진 인천상륙작전으로 미군 군사시설이 월미도에 들어오면서 고향을 등져야만 했다.

▲ 북한 피격으로 백령도 인근 바다에서 침몰한 천안함 희생자의 추모식이 열리고 있다.
▲ 북한 피격으로 백령도 인근 바다에서 침몰한 천안함 희생자의 추모식이 열리고 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1952년부터 주민들은 시에 귀향을 요청했지만, 시의 답변은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니 철수하면 들어가게 해주마’였다. 주민들은 희망을 안고 현재 8부두가 있는 과거 얼음창고 주위에서 30가구가 모여 나무껍질과 운반하다 떨어진 석탄 등을 주워 팔며 살았다. 하지만 당시의 공언은 아직까지 지켜지지 않고 있다. 남북은 북방한계선(NLL)을 둘러싸고도 숱한 갈등을 빚어왔다. 1953년 휴전 직후 UN사령부는 NLL을 설정했다. 남측은 실질적인 영토 경계선이라고 주장하며 지금의 NLL을 고수해 왔다.

반면, 북측은 38선을 기준으로 NLL설정을 요구했다. 이럴 경우 서해 해상분계선은 남쪽으로 덕적도 인근 해상까지 내려온다. NLL은 ‘꽃게 전쟁’으로 불리는 비극을 잉태하고 있는 셈이었다.

1999년 6월 15일 제1차 연평해전이 터졌다. 북한 등산곶과 5.5㎞, 남한 어로저지선과 11㎞ 떨어진 연평도 인근 북방한계선 이남 해전으로 남한 해군 11명 경상, 북한군 30명 사망, 70명이 다쳤다. 2002년 6월 29일 연평도 인근 북방한계선에서 충돌이 벌어졌다. 제2연평해전이다. 북한군의 기습 공격으로 우리 측 고속정 357호는 바닷속으로 가라앉았고, 고(故) 윤영하 소령 등 장병 6명이 싸늘한 주검으로 변했다.

▲ 꽃개전쟁으로 불리는 제1연평해전 승전 18주년 기념행사.   <기호일보 DB>
▲ 꽃게전쟁으로 불리는 제1연평해전 승전 18주년 기념행사. <기호일보 DB>
2010년 3월 24일에는 천안함 침몰 사건이 있었다. 백령도 근처 해상에서 남측 천안함이 피격돼 해군 장병 40명이 사망하고 6명이 실종됐다. 남한과 오스트레일리아, 미국, 스웨덴, 영국 등 5개국에서 전문가 24여 명으로 구성된 합동조사단은 2010년 5월 20일 천안함이 북한의 어뢰 공격으로 침몰한 것이라고 발표했다.

북한은 2010년 11월 23일 옹진군 대연평도를 향해 포격을 가했다. 남한 해병대는 피격 직후 대응사격을 하고 서해 5도에 진돗개 하나를 발령했다. 곧 전군으로 진돗개 하나가 확대됐다. 이 사건은 한국전쟁의 휴전협정 이후 북한이 남한을 직접 타격해 민간인이 사망한 최초의 사건이다. 해병대원 2명, 군인 중경상 16명, 민간인 사망자 2명, 민간인 중경상 3명의 인명피해를 입었다.

서해 5도를 포함한 인천 바다가 ‘상실의 바다’에서 ‘상생의 바다’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 이유다.

이창호 기자 ych23@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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