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히 이번 평양공동선언으로 65년 분단의 아픔은 인천에서 새로운 희망으로 아물게 됐다.
남북이 18~20일 제3차 정상회담에서 체결한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군사 분야 합의서’는 육지와 하늘, 바다에서 일체의 무력사용을 금지하는 내용이 담겨 사실상 불가침 선언이다. 특히 지상과 해상, 공중에서 적대행위를 막는 완충지대를 설정한 것은 분단 이후 처음으로 우발적 충돌을 막는 데 큰 효과를 발휘할 것으로 전망된다. 인천을 분단의 아픔으로 처음 물들인 것은 ‘인천상륙작전’이다.
지난 5일 인천시장 집무실 앞에서 월미도 원주민이 울고 있었다. 한인덕(74) 월미도귀향대책위원장이 시장을 만나고 싶다며 절규했다. 한 위원장을 비롯한 만석동 79 일대에 살던 주민들은 1950년 9월 10일 융단폭격, 잇따라 터진 인천상륙작전으로 미군 군사시설이 월미도에 들어오면서 고향을 등져야만 했다.
반면, 북측은 38선을 기준으로 NLL설정을 요구했다. 이럴 경우 서해 해상분계선은 남쪽으로 덕적도 인근 해상까지 내려온다. NLL은 ‘꽃게 전쟁’으로 불리는 비극을 잉태하고 있는 셈이었다.
1999년 6월 15일 제1차 연평해전이 터졌다. 북한 등산곶과 5.5㎞, 남한 어로저지선과 11㎞ 떨어진 연평도 인근 북방한계선 이남 해전으로 남한 해군 11명 경상, 북한군 30명 사망, 70명이 다쳤다. 2002년 6월 29일 연평도 인근 북방한계선에서 충돌이 벌어졌다. 제2연평해전이다. 북한군의 기습 공격으로 우리 측 고속정 357호는 바닷속으로 가라앉았고, 고(故) 윤영하 소령 등 장병 6명이 싸늘한 주검으로 변했다.
북한은 2010년 11월 23일 옹진군 대연평도를 향해 포격을 가했다. 남한 해병대는 피격 직후 대응사격을 하고 서해 5도에 진돗개 하나를 발령했다. 곧 전군으로 진돗개 하나가 확대됐다. 이 사건은 한국전쟁의 휴전협정 이후 북한이 남한을 직접 타격해 민간인이 사망한 최초의 사건이다. 해병대원 2명, 군인 중경상 16명, 민간인 사망자 2명, 민간인 중경상 3명의 인명피해를 입었다.
서해 5도를 포함한 인천 바다가 ‘상실의 바다’에서 ‘상생의 바다’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 이유다.
이창호 기자 ych23@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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