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직위에 있는 사람을 매수해 사사로운 일에 이용하기 위하여 넌지시 건네는 부정한 돈이나 물건을 주는 행위를 와이로(わいろ), 즉 뇌물이란 뜻인데 그 말이 고려시대 생겨났다고 유래되고 있다.

 고려시대 의종 임금이 하루는 단독으로 야행(夜行)을 나갔다가 깊은 산중에서 날이 저물었다. 다행이 민가를 하나 발견하고 하루를 묵고자 청을 했지만 집주인(고려 중기 유학자 이규보 )이 조금 더 가면 주막이 있다는 이야기를 해 임금은 할 수 없이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런데, 그 집 대문에 붙어있는 글이 임금을 궁금하게 했다. 그렇게도 궁금하게 여겼던 ‘唯我無蛙 人生之恨(유아무와 인생지한)’ 이란 글에 대해 들을 수가 있었다. 옛날에 노래를 아주 잘하는 꾀꼬리와 목소리가 듣기 거북한 까마귀가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꾀꼬리가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하는데 까마귀가 꾀꼬리한테 내기를 하자고 했다. 백로(白鷺)를 심판으로 하여 노래 시합을 하자고 했다. 그런데 노래시합을 제의한 까마귀는 노래 연습은 안하고 자루 하나를 가지고 논두렁의 개구리를 잡아 백로한테 뇌물로 가져다줘, 결국 심판인 백로는 까마귀의 손을 들어 줬다. 한동안 꾀꼬리는 노래 시합에서 까마귀에 패배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서 백로가 가장 좋아하는 개구리를 잡아다 주고, 까마귀가 뒤를 봐 달라고 힘을 써서 본인이 패한 사실을 알게된 꾀꼬리는 크게 낙담하고 실의에 빠졌다.

 이 글은 이규보 선생이 임금한테 불의와 불법으로 뇌물을 갖다 바친 자에게만 과거 급제의 기회를 주어 부정부패로 얼룩진 나라를 비유해서 한 말이었다. 이때부터 와이로란 말이 생겼다고 한다. 즉, 와(蛙)개구리 ‘와’, 이(利)이로울 ‘이’, 로(鷺)백로 ‘로’.

 임금은 궁궐에 돌아와 즉시 임시 과거를 열 것을 명(命)했다. 과거 보는 날, 시험관이 내 걸은 시제가 바로 ‘唯我無蛙 人生之限’이란 여덟 글자였는데, 이규보는 임금이 계신 곳을 향해 큰절을 한번 올리고 답을 적어 냄으로써 장원급제해 유명한 학자가 됐다고 한다. 이때부터 ‘와이로’(蛙利鷺/唯我無蛙 人生之恨)란 말이 생겨났다고 유래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와이로 문화가 사라지길 바라는 마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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