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 간의 물밑 협상이 치열한 가운데 리용호 북한 외무상이 29일(현지시간) 뉴욕 유엔총회 연단에서 비핵화 진전을 위해서는 '신뢰조성'이 우선이라는 메시지를 다시금 강력하게 발신해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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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엔총회 연설하는 리용호 북한 외무상
리용호 북한 외무상이 29일(현지시간) 뉴욕 유엔총회 연단에서 연설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자료사진]
리 외무상의 이날 유엔총회 일반토의 연설은 비핵화를 행동에 옮기려면 미국이 신뢰구축 조치를 통해 이를 위한 '여건'을 마련해줘야 한다는 내용으로 집약된다.

이런 입장은 "미국에 대한 신뢰가 없이는 우리 국가의 안전에 대한 확신이 있을 수 없으며, 그런 상태에서 우리가 일방적으로 먼저 핵무장을 해제하는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는 리 외무상의 발언에 압축적으로 담겨 있다.

그는 "조선반도(한반도) 비핵화도 신뢰조성을 앞세우는데 기본을 두고…"라거나 "신뢰조성을 특별히 중시하고 여기에 선차적인 힘을 넣고 있다"는 등의 표현으로 현 단계에서 북한이 선(先) 신뢰조성에 방점을 두고 있음을 명확히 했다.

이는 6·12 북미정상회담 이후 북미 협상이 교착 상태를 이어오는 동안 북한이 일관되게 견지해온 논리의 '틀'이다. 미국이 상응 조치를 취하면 북한도 영변 핵시설의 영구적 폐기 등 추가 조치에 나설 용의가 있다는 9월 평양공동선언 조항도 이런 논리 구조에서 나왔다.

리 외무상의 이번 메시지도 결국 기존 입장을 강하게 재확인하는 데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은 셈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연설은 평양 남북정상회담과 유엔총회를 거치며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의 내달 방북이 합의되는 등 최근 북미가 조금씩 비핵화와 체제안전 보장 조치의 접점을 찾아가는 듯한 상황과 외견상 다소 결을 달리한다고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리 외무상의 위치나, 전 세계에 공개되는 유엔총회 연설의 성격, 북한의 체제 특성 등을 볼 때 그가 크게 전향적인 언급을 내놓기는 애초부터 어려웠으리라는 관측이다.

대신 이번 연설은 국제 무대에서 자신들의 대원칙을 공개 천명함으로써 협상이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임을 강조하고, 이를 통해 미국의 양보를 좀 더 견인하기 위한 '장외 압박' 성격에 가까워 보인다.

비핵화 협상의 핵심 실마리를 제시하는 것은 조만간 폼페이오 장관을 만날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몫으로 남겨뒀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폼페이오 장관도 방북을 앞둔 만큼 기존 주장을 재확인하면서 일종의 기싸움을 하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김성 유엔 주재 북한 대사는 이날 연설이 끝난 뒤 미국의소리(VOA) 방송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리 외무상의 연설 내용이) 세지 않았다. 우리가 신뢰구축을 호소한 것이지 그게 왜 센 것이냐"고 말했다고 VOA가 보도하기도 했다.

실질적으로 북미는 종전선언 등 신뢰조성을 위한 조치들과 영변 핵시설 폐기, 국제 사찰단 수용 등 비핵화 조치들의 다양한 순서와 조합을 물밑에서 맞춰보며 첨예한 협상을 벌여 나가리라는 관측이다.

양무진 교수는 "엄격한 동시행동은 어렵다는 측면에서, 동시성과 순차성이 모두 가미된 방안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날 리 외무상의 발언 중에 또 하나 눈여겨볼 부분은 "제재가 우리의 불신을 증폭시키고 있는 것이 문제"라며 대북제재 완화 또한 '신뢰'의 문제로 규정한 점이다.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도 이날 미국의 대북제재를 비난하는 논평을 게재, "미국이 제재 압박의 도수를 높이면서 상대방과 대화하자고 하는 것이야말로 모순"이라고 주장했다.

북한이 향후 중국·러시아와의 '협공' 하에 미국에 제재 완화를 요구하는 공세를 강화할 것으로 점쳐볼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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