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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채훈 삼국지리더십연구소장
중국 쪽에서 백두산에 오르는 길은 크게 세 갈래다. 서파(西坡), 남파(南坡), 북파(北坡)다. 파(坡)는 언덕, 고개, 비탈이라는 뜻. 서파를 오르면 커다란 표지석이 있다. 붉은 글씨로 ‘중국 37 2009’, 뒷면의 글귀는 ‘조선 37 2009’. 이른바 ‘37호 경계비’다. 통상 ‘5호 경계비’가 바로 이것. 건너편 북파 쪽에 38호 경계비(통상 6호 경계비)가 서 있고 양쪽으로 나뉜다. 천지의 호수면 넓이는 9.165㎢로 여의도 면적의 3배를 웃도는데 북한의 영유권이 55%, 중국의 영유권이 45%. 이것도 1962년에 간도협약을 무효로 하고 조중(朝中)변계조약을 체결해 국경선을 다시 그을 때 확정된 것으로 그동안 북한 정권이 백두산 주변 땅을 한국전쟁에 참전한 감사의 뜻으로 중국에 떼 주었다거나 돈을 받고 팔아넘겼다는 뜬소문과는 다르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백두산 정계비 설치에 대한 한국과 중국, 일본의 얽힌 사연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간도협약에 대해서다.

 간도(間島)라고 하면 예로부터 중국과 우리 모두로부터 외면당했던 황무지. 처음 이곳에서 세력을 떨친 건 여진족. 1636년 청을 세운 그들은 자신들이 성지로 여기는 이 지역에 이민족들이 드나들지 못하도록 봉금(封禁) 정책을 폈고, 1712년 청의 강희제가 양국 간 국경을 확정 짓도록 해 ‘백두산 정계비’가 세워졌다.

 이후 국경 분쟁은 수그러들었으나 1869년과 1870년에 걸쳐 함경도에 흉년이 들어 조선인들이 대거 간도로 이주하면서 다시 표면화됐다. 조선은 1902년 이범윤을 간도관리사로 임명해 간도 거주민에 대한 직접적 관할권을 행사하는 등 적극적으로 나섰으나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제가 외교권을 강탈하고부터 상황이 달라진다.

 일제는 청국과 간도에 대한 회담을 벌여 처음에는 "간도가 조선 영토의 일부"라며 우리의 입장을 두둔하는 듯했으나 이는 2년 후 간도를 팔아먹기 위한 기만책이었다.

 일제가 만주철도, 탄광 등 다섯 가지 이권을 받으면서 그 대가로 간도 영유권을 청국에 넘겨준 것. 조선인들이 100년 이상 피땀 흘려 개척했던 간도가 이렇게 해서 우리 영토에서 사라진 것은 물론 한반도와 중국의 국경선이 우리 민족의 뜻과는 무관하게 정해진 것이다. 이때 천지의 우리 영유권은 20% 남짓이 되었으니 일제의 이권 쟁탈에 희생당했던 역사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백두산을 둘러싼 청국과 조선의 갈등, 일제와 청국의 거래, 그리고 우리의 요구가 관철된 이후의 변화 속에서 남북한 어디에 살든 한국인들에게는 그곳은 민족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대표적 자연물이자 영산(靈山)이고 한반도 모든 산의 조종(祖宗)이자 항일 독립운동의 성지다.

 지난 9월 백두산 천지 가에서 남북의 두 정상이 손을 맞잡은 모습에 더 각별한 느낌을 받는 건 당연하다. 애초 남북 사이의 약속대로 되었다면 북한 쪽에서 백두산에 오르는 문재인 대통령의 꿈은 훨씬 앞당겨졌을 터. 2005년 7월 남북은 개성 및 백두산 관광을 추진하기로 합의했었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 때의 ‘10·4선언(6항)’에서는 백두산 관광을 위한 직항로를 열기로 했으며 그해 11월 현대아산과 북한의 아태평화위원회가 관광합의서를 작성하기에 이른다. 곧이어 정부 합동실사단의 현지 답사까지 이뤄졌지만 2008년 남북관계가 끊기면서 모든 게 미뤄졌다.

 결국 많은 이들이 백두산을 찾으려면 중국 쪽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에 의해 만주의 이권 대신 빼앗긴 간도 땅, 그리고 철거당한 백두산 정계비의 아픈 역사 속에서 108년의 긴 세월 동안 남의 땅이 된 듯한 모호한 민족 표상을 이제 정상회담의 훈풍을 맞아 수많은 우여곡절이 앞에 놓여 있겠으나 관광으로라도 기대해 본다.

 대립과 긴장의 국경선이 우호의 접합점, 나아가 남북은 물론 한중의 영역을 넓혀주는 확장자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백두산이 오늘과 같은 지위를 얻은 것이 한민족 또는 조선민족이라는 복합명사가 생긴 시점과 ‘성자신손 오백년은’으로 시작하던 애국가 가사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으로 바뀐 때와 일치한다는 점도 덧붙여 기억했으면 싶다. ‘백두산 영봉에 태극기 날리고’가 남북 대결이 아닌 민족의 숙원이었음도 함께 말이다.

▣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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