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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강동 <인천시 중구 우현로>
지난해 5월 정부의 지원으로 고조선 분야를 연구하는 인하대 고조선연구소가 만주지역 고려시대 국경선에 관한 학술회를 인천이 아닌 서울에서 개최한다는 소식이 있었다. 우리의 역사문제라 관심을 갖고 여러 관련 자료를 찾아 살펴보았다. 드넓은 만주지역은 우리 민족의 강인함과 진취적 성격을 보여주고 있는 유적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고조선에서 대한제국에 이르기까지 만주지역 대부분은 우리 영토였다. 가장 넓게 차지하고 있던 시기는 고구려 장수왕 475년이었다.

인천으로부터 시작해 동쪽으로 러시아 연해주, 서쪽으로는 중국 산해관 부근, 북쪽으로는 몽골 국경까지 광활한 만주대륙을 활개 펴고 생활해 온 우리 민족이었다.

우리와 중국의 만주지역 국경선 문제는 오래된 일이다. 국경선 문제로 중국과 처음 회담한 것은 우리의 국력이 약했던 시기 1627년이다. 중국 청나라와 간도회맹이 체결된다. 만주동변도 23개 현 지역을 완충지대로 설정하고 봉황, 관전, 흥경, 회인, 통화, 개헌에 국경 출입문을 설치하고 나머지 지역을 출입금지 지역으로 한다는 우리와 청국의 회담이었다.

1677년에는 백두산 좌우 천리를 출입 금지지역으로 설정한다는 발표가 일방적으로 청국에서 나왔다. 청국은 또다시 우리와 청국의 국경선을 분명히 하기 위해 1712년 모극등을 내세워 고려의 터전이었던 만주 봉황에서 백두산에 이르는 지역을 국경선으로 결정하고 백두산 분수령에 정계비를 세운다는 발표가 나온 것이다. 압록강과 토문강을 청나라 영토로 편입해 국경선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역사성에 반하는 청국의 부질없는 발표에 말대꾸도 하지 않고 오랜 기간 묵묵히 있던 우리는 조선 고종이 만주지역을 조선의 고유 영토라는 역사상을 열거하는 국서를 청국에 보낸다. 1883년 고종의 명을 받은 조선서북지역 책임자 어윤중은 백두산 분수령에 세운 정계비는 잘못된 것으로 청국지역이 아닌 조선 영토라는 외교서신을 청국에 보내 만주 국경선 문제의 재발단이 된다. 청국에서는 계속적으로 국경선 넘나드는 것을 금지하라는 요구가 있으나 우리가 강력하게 항의하며 받아 들이지 않자 1884년 우리와 청국의 회담, 1885년 러시아와 통상조약, 1888년 러시아와 육로 통상조약, 1888년 청국과의 통상회담으로 만주 국경선의 금지 지역을 철회하고 만주지역을 완전 개방하게 된다. 러시아 연해주로도 왕래가 자유로워졌다. 대한제국 시절에는 이범윤, 이용태, 서상열 등의 휘하 병력을 만주로 파견해 그곳에 향약을 설치하고 만주 동변도 23개 현에서 생활하는 우리 국민의 보호에 나서기도 했다.

국경선 문제를 명확하게 결정내지 못한 채 1909년 외교권이 일본에게 뺏기면서 일본과 청국의 만주협약에 의해 만주영토권을 청국에 넘기고 오늘에 이른 것이다. 만주지역 중국과의 국경선 경계로 삼은 것이 우리의 영토로 흐르는 압록강이다. 고조선 연구소가 밝힌 강 이름 요하가 고려시대 삼경지역으로 흐르는 압록강이다. 중국에는 압록강의 다른 이름으로 패수, 마자수, 대요수, 요하라 불렀으며 중국의 역사 고서들도 같은 내용을 서술하고 있다. 우리의 학자 정약용도 대한강흑고에서 패수를 압록강이라고 했다. 일본인 저자의 조선역사지리에서도 압록강을 패수로 보고 있다. 지금의 백두산 주변으로 흐르는 압록강이 아닌 백두산에서 발원해 우리의 영토였던 만주대륙을 깊숙이 휘돌아 서해로 합류하는 압록강이다. 만주대륙 봉천성, 길림성, 용강성, 흥안성, 빈강성, 관동주의 동변도지역 마천령과 철령을 걸쳐 압록강 중류지대 봉천성 집안현 통구에 자리 했던 고구려의 국내성, 평양성 주변으로 흐르는 압록강이다. 고구려 시절에는 압록강은 고구려의 엄리대수(奄利大水)라 하여 오래도록 이롭게 할 큰 물이라고 했다. 고조선에서 대한제국 시절까지 중국과의 국경선은 압록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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