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창의도시로 발돋움하면서 문화가 살아 숨 쉬는 곳으로 거듭나고 있는 이천시.

이천시는 삼국시대 백제와 고구려·신라가 서로의 지역으로 편입하기 위해 치열하게 각축전을 벌인 한반도의 전략적 요충지다. 신라 진흥왕 29년(568년)에는 한강유역으로 진출하는 최북단 전초기지로 ‘남천주’라는 행정관청과 ‘남천정’이라는 군사조직이 주둔한 곳이기도 하다.

통일신라시대에 이르게 되면서 전쟁의 참화를 가장 심하게 겪었다. 그래서 백성들이 겪은 오랜 전쟁의 상처를 달래기 위해 신라 문무왕(661∼668)의 스승인 의상대사(625∼702)가 북악사(北岳寺)를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18세기 후반(1774년)에 이 절을 중창한 영월(영월) 낭규스님의 이름을 따 영월암으로 개명 후 지금에 이르고 있다.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이곳에 문화적 가치가 높아 잘 보존하고 지켜야 할 유산들을 소개한다.

▲ 영월암 전경.

# 천년을 품은 ‘영월암’

 고통에서 벗어나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소망이다. 삼국의 싸움터가 됐던 이천지역 백성들은 하루속히 전쟁이 끝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을 것이다.

 영월암의 전신인 북악사(北岳寺)는 삼국의 영토 전쟁으로 참화를 겪은 백성들의 상처를 달래고자 창건한 것으로 보여진다.

 문헌상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인근에 있는 설봉산성 발굴조사에서 발견된 출토 유물을 보면 천년을 이어왔음이 확인된다. 대표적인 것이 영월암 삼성각 좌측에 있는 석조광배와 연화대좌(향토유적 제3호)이다.

 전체 높이는 156㎝, 폭 118㎝, 두께 45㎝로 주형거신광(舟形擧身光) 형태의 석조광배는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표현하는 기법이 통일신라의 특징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연화대좌 또한 통일신라 말과 고려 초 조성된 것들과 유사한 특징을 보이고 있다.

▲ 영월암 연화대좌 및 석조광배.
# 시민들의 평온을 비는 ‘영월암 마애여래입상’

이천의 진산으로 꼽히는 설봉산 정상 가까이에 자리잡은 영월암.

대웅전 뒤편을 보면 거의 10m에 육박하는 거대한 암벽을 이용해 조성된 ‘영월암 마애여래입상’이 있다. 이천시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에 우뚝 서 있는 이 미륵불은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보물 제822호로 지정됐다.

미륵불은 삼국시대 왕실에서 조성하기 시작해 고려 초와 조선 후기를 거쳐 여러 곳에 조성됐으며 수명 장수, 곡물 풍성, 살기 좋은 자연환경, 전쟁 등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며 만들었다.

이천지역은 그동안 전략적 요충지로 수많은 전쟁을 겪었던 참혹한 상황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서 왕실이 아닌 지역민들이 스스로 조성했다.

# 나옹대사의 효심이 깃들다

영월암 입구에 들어서면 위풍당당한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우뚝 서 있다. 나옹대사가 가지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 놓고 절을 떠난 후 나무가 자랐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 나무는 높이 37m, 둘레 5m의 일근이주(一根二柱, 한 뿌리에 2개의 나무)로 수령은 650여 년이 넘었으며 가을이 되면 노란색으로 물들여진 아름다운 풍경이 연출된다.

특히 나옹대사의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효심이 묻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중국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행하던 중 돌아가신 어머님에 대한 불효를 한스러워 하다 고국에 돌아온 나옹대사가 이곳에서 49일간 극진한 기도를 통해 어머니가 천도왕생했다. 부모를 위한 효심은 스님들도 일반인들과 다를 바 없고, 누구나 열심히 기도하면 선망 부모의 왕생극락과 자신의 업장을 소멸할 수 있다는 뜻으로 전해져 기도객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 항일투쟁의 본거지로 역사도 간직

고종 31년(1894년) 설봉산에서 동학농민군과 관군이 치열한 접전을 벌였고, 1907년 고종황제가 강제 퇴위당한 후 신식군대가 강제 해산되자 무장항일 투쟁이 전개된 곳이다.

대한제국 신식군대의 중대장 출신 ‘허준’이 주로 설봉산을 배수진으로 해 극렬한 무장투쟁을 벌이면서 멀리는 남한산성까지 나아가 수도진공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이천의병들도 항일 무장투쟁에 가세하다 파견된 일본군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했고 수많은 양민들이 학살됐다.

▲ 향교 누각으로 지은 대웅전.
특히 이때 이천 관내 4개 읍·면과 12동리 등에서 930여 가구에 달하는 민가를 전소시킨 ‘이천충화사건(利川衝火事件)’이 자행됐으며, 당시 일제 군대가 산속 절이 의병의 은신처라는 이유로 영월암도 방화돼 폐사 지경에 이르렀다.

이후에도 설봉산 영월암을 근거지로 끊임없이 항일 무장투쟁이 일어나자 이천관아에 일본군이 주둔하게 됐고, 1914년에는 일본 총독부령에 의해 이천경찰서가 설치됐다. 이때 관아 및 객사 등 주요 건물 대부분이 해체됐지만 이천시민들의 원성과 여론을 의식해 관아 입구에 서 있던 2층 구조의 문루를 이천향교 입구로 옮겨 ‘풍영루’라는 누각을 지었다.

해방 후 누각의 노후로 인해 무너진 채로 방치, 목재 및 석재 등 누각부재 일체를 영월암으로 옮겨와 대웅전을 만들어 일제강점기 이천의 역사를 간직한 대표적인 목조건축물이 됐다.

# 정신적 귀의처로의 역할 기대

▲ 나옹대사가 꽂은 지팡이가 자란 은행나무.
불교는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병자호란 등 국가적 위기 사태가 일어날 때마다 승려들의 의병활동 등으로 나라를 구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영월암은 경기도내 14개 방번(防番, 보초근무) 사찰 가운데 한 곳으로 각종 전란과 삼정의 문란 등 조선 후기 정치적 실정으로 인해 성리학 중심의 국가체제가 혼돈 상태에 이르게 됐을 때 등 국난 극복을 위해 호국은 물론 민중의 삶을 어루만지는 역할을 해 왔다.

이렇듯 영월암은 구한말 의병의 중심지이자 이천지역 항일투쟁의 거점으로서 불의에 저항하고 호국에도 앞장서면서 우리의 역사와 함께 호흡해 왔다. 특히 유림세력이 강했던 이천지역에서 향교의 누각부재로 대웅전을 지은 것으로 보아 종교를 떠나 지역민들의 선구자적인 역할도 했다.

이런 도도한 기운에 힘입어 앞으로도 이천 시민사회의 정신문화를 일깨우고 시민들의 편안한 안식처로 자리매김하길 기대해 본다.

이천=신용백 기자 syb@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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