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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누구나 성공하고 싶어 합니다. 세상이 ‘나’를 평가하는 기준이 ‘성공’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성공을 위한 공부에 매진하며 성장했습니다. 성공하기 위해 공부하고 성공하기 위해 사람들을 만납니다. 성공을 쉽게 정리하면 더 많이 ‘가지는 것’이고 경쟁에서 ‘이기는 것’입니다. 더 갖게 되고 더 높이 올랐을 때 성공한 것이고, 그래서 성공이 마치 삶의 목적인 것처럼 여기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공이 행복을 보장해주지는 않습니다. 성공과 행복을 물과 기름으로 비유하기도 합니다. 섞이질 않으니까요. 왜냐하면 행복은 성공과 달리 ‘나누는 것’, ‘져줄 줄 아는 것’, 그리고 ‘즐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 중 하나는 성공하면 행복할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관련 연구들에 따르면, 성공의 기준인 ‘돈’, ‘권력’, ‘명예’가 행복에 그다지 큰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성공과 행복을 여행길의 ‘목적지’와 ‘과정’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도 있습니다. 성공이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라면, 행복은 가는 과정에서 느끼는 즐거움입니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이내 다른 목적지를 정하고 다시 그곳을 향해 움직입니다. 그래서 성공은 늘 미래를 지향하게 돼 있습니다. 만족을 모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행복은 늘 ‘지금 이 순간’에 머물며 순간순간을 즐겁게 마주합니다. 가는 과정에서 만나는 산들바람과 벗이 되고, 나무 밑에서 노니는 다람쥐와 친구가 돼 만남을 즐깁니다. 그러나 성공지향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은 과정에서 만나는 기적 같은 인연들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로지 목적지에만 집중하고 있으니까요. 목적지로 가는 과정은 그저 고통스럽기만 느껴집니다. 그래서 과정에서 만나는 소소한 즐거움을 놓치곤 합니다. 소소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바로 행복인데 말입니다.

 2차 대전이 한창일 때였습니다. 남태평양의 어느 섬에 도착한 미군 장교들과 그곳의 원주민들이 달리기 시합을 했다고 합니다. 출발신호가 울리자 미군 장교들은 100m 달리기를 하듯 쉬지 않고 결승선까지 달렸지만, 원주민들은 뛰어가다가 멈춰 서서는 대화를 나누거나 바다를 물끄러미 응시를 하고 있습니다. 시합이 끝나고 미군 장교가 왜 그랬는지를 물었습니다. 원주민의 대답은 놀라웠습니다.

 "지금 당신은 무척 힘들어 하잖아요."

 그랬습니다. 미군 장교들은 빨리 달리는 것이 시합의 목적이었지만 원주민은 달리는 과정에서 얼마나 즐거웠고 얼마나 아름다운 것을 보았느냐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원주민들이 생각하는 시합의 법칙은 과정에서의 즐거움이었던 것입니다. 미군 장교들은 ‘성공’지향적으로, 원주민들은 ‘행복’지향적으로 사유한 결과입니다. 그래서 미군 장교들은 이기기 위해서 뛰었고, 원주민은 즐기기 위해서 뛰었습니다.

 목적지는 미래에 있지만 과정은 매 순간순간입니다. 돼지는 사람들이 자신보다 젖소를 더 귀하게 여기는 것이 부러워서 물었다고 합니다.

 "나도 죽고 나면 내 몸을 다 주는데 왜 나는 귀하게 여기지 않을까?"

 그러자 젖소가 말했습니다.

 "나는 일용할 양식을 주잖아. 우유 말이야. 하지만 너는 살아있을 때는 아무 것도 주지 않잖아. 그러니 너도 귀하게 대접받으려면 지금 이 순간에 사람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를 고민해봐. 그러면 너도 나처럼 높게 평가받을 거야."

 젖소가 사랑받은 이유는 매 순간순간 ‘너’에게 유익함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나누는 삶을 살았던 겁니다. 성공에 매몰되면 ‘너’는 ‘나’의 경쟁자일 뿐이지만, 행복을 느낄 줄 알면 ‘너’는 ‘나’의 친구가 됩니다.

 교육부장관이 새로 임명됐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이제까지 교육이 ‘더 가지고’ ‘이기려는’ 성공지향적인 삶을 가르쳐왔다면 이제부터의 교육은 ‘나눌 줄 알고’ ‘져줄 줄 알고’ ‘즐길 줄 아는’ 행복지향적인 내용으로 바뀌는 계기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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