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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물줄기 따라 인천 역사가 흐른다

[다시 쓰는 인천 하천 이야기] <5> ‘사연 많은’ 승기천

박정환 기자 hi21@kihoilbo.co.kr 2018년 10월 09일 화요일 제14면

▲ 인천 연수구 원인재역 인근 승기천을 가로지르는 수인선 폐철교. 이진우 기자 ljw@kihoilbo.co.kr
‘수인선, 꼬마열차, 염말, 방죽, 남동산업단지, 저어새…’ 승기천 하면 떠오르는 단어다. 승기천은 그만큼 숱한 사연을 담고 있다. 인천시 남동구 구월동 농산물도매시장에서 남동인더스파크(남동산단) 유수지까지 6.2㎞의 승기천에는 얘깃거리가 수두룩하다. ‘승기천’이라는 이름부터도 그렇다. 사실 승기천은 족보가 없다. 미추홀구 관교동 북동쪽 ‘신비마을’로 불리는 옛 ‘승기리’에서 따왔을 것이라는 어림짐작 뿐이다. ‘다시 이어서(承) 생긴 마을(基).’ 한때 폐허가 없어졌다가 다시 생긴 마을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고증되지 않은 유래다.

 승기천의 발원지도 아리송하다. ‘주안동이다’, ‘용현동이다’ 의견이 분분하다. 누군가는 수봉산 남서쪽 해발 60여m쯤 되는 기슭이라고 주장한다. 또 다른 이는 인천도호부청사와 향교가 있는 ‘승기산’이라고 말한다. 발원지는 명확치 않아도 원래 물줄기는 뚜렷했다. 관교동을 지나 남촌동을 거쳐 논현동 앞바다로 흘러들었다. 하지만 지금 상류 쪽은 모두 없어졌다. 구불구불하던 내(川)의 모습도 바뀌었다. 남동산단 조성으로 반듯한 물길로 아주 새롭게 변했다. 남동산단과 연수택지개발지구 사이를 거쳐 동춘동 동막마을 쪽으로 빠지는 지금의 모습이다. 구한 말 선학동 뒤편 지금 문학경기장 인근 제2경인고속도로 고가가 지나가는 곳까지 바닷물이 들고났다. 연수구 옥련동은 말할 것 없이 연수동, 청학동, 선학동까지 ‘먼우금’이라 했다.

 한자로는 ‘원우금(遠又今)’ 또는 ‘원우이(遠又爾)’라 적었다. 걸어서 가려면 한참을 멀리(遠) 돌아서 가야 했지만(又), 배로 건너면 가깝다(爾)는 뜻이다. 지금이야 아파트 숲이지만 승기천은 흡사 갯골 모습이었다.

▲ 수인선 폐철교.
 지금 남동공단 유수지 인근 ‘큰 골’에서 시작되는 갯골은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크게 네 갈래로 갈라졌다. ‘큰 골’은 지금 남동유수지 배수 펌프장 자리로 배를 대던 선착장이었다. 그 한 줄기는 동춘동 동막과 남동산단 제1근린공원인 부수지 사이를 거쳐 저수지에 닿았다. ‘동막(東幕)’이라는 마을 이름은 논에 물을 대기 위해 둑을 막는다는 뜻인 ‘동막이 한다’라는 말에서 비롯됐다. 또 하나 갯골은 사라진 대원예도(大遠禮島)와 소원예도(小遠禮島)의 왼쪽을 돌아 연수동 쪽으로 틀어진 갯골이었다. 여기에 지금 논현 주공 아파트가 들어선 사리동(沙里洞)의 범아가리곶(虎口浦)을 돌아 선학동인 도장리(道章里)에 닿는 갯골로 갈라졌다.

 지금의 남촌동인 와우리(臥牛里)에서 남동경찰서 인근까지 다다르는 곁가지 골이 또 나 있었다.

 갯골이 닿는 동네 언저리에는 하나같이 방죽들이 들어섰다. 그 때만 해도 논농사는 비가 내려야 농사에 필요한 물을 얻을 수 있는 터라 방죽과 둠벙은 긴요한 시설 중 하나였다.

 남촌동에는 국장내방죽이, 도림동에는 큰방죽과 개미방죽이, 논현동에 동녘방죽과 가오산방죽, 괴하방죽 등이 자리했다. 고잔동에도 갈산이라는 방죽이 있었다. 승기천에서는 인천의 하천 중 유일하게 옛 수인선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연수구 선학동~남동구 남촌동~논현동 등지 커다란 갯골과 맞닿아 있던 조그마한 마을이었다. 이 동네를 ‘염말’이라 불렀다.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만드는 자염 밭이 많았기에 지어진 이름이었다. 1930년대 초 남동염전이라 불렀던 이곳을 포함해 소래, 군자 등지는 전국에서 제일 큰 소금 밭이었다. 이곳에서 생산됐던 소금은 연간 15만t에 달했다. 전국 생산량의 절반에 이르는 양이었다. 당시 일제는 인천출장소를 세워 염전과 그곳에서 생산된 소금을 관리하면서 일본 본국으로 실어 날랐다.

 수인선은 소금 덕에 생겼다. 1937년 8월 6일 ‘꼬마열차’ 수인선 협궤열차의 첫 기적소리가 울렸다. 조선경동철도㈜가 공사에 들어간 지 2년 만에 수원역~인천시 중구 신흥동 삼익아파트 인근에 있던 남인천역까지 총 52㎞에 이르는 철도 부설공사를 끝마쳤다. 본래 소금을 수송하기 위해 건설된 수인선은 1931년 개통한 수여선(수원∼여주 간 74.3㎞)과 맞닿아 있어 경기도 여주, 이천 쌀의 수송도 맡았다. 수인선은 해방 후 사설 철도와 부대시설 국유화 조치(1946년 5월 10일)로 다른 철도와 함께 국가에 귀속됐다.

 

▲ 수인선 폐철교.
1960년대까지만 해도 증기 기관차가 객차 6량과 화물차 7량을 달고 15개 역을 하루 평균 7차례 운행했던 수인선은 급격히 사향세로 돌아섰다. 쌀 수송의 의미가 거의 사라진 데다 다른 염전지대의 확장과 물량 확대, 버스와 트럭 등 대체교통수단의 등장으로 수인선의 승객과 화물이 눈에 띄게 줄었던 것이다.

 적자가 눈덩이처럼 늘자 철도청은 1973년 11월 송도~남인천 간 5.9㎞의 운행을 중단했다. 수인선은 1년 전에 이미 끊긴 상태였다. 1992년 7월에는 소래역~송도역 운행을 끊겼다. 철도청은 하루 평균 이용객이 250명에 불과해 적자가 연간 20억여 원에 이르자 1995년 12월 3일 여객운송을 중단하고 수인선 전 구간을 완전 폐쇄했다. 지금의 승기천 물줄기는 남동산단 조성과 궤를 같이했다. 1980년 신군부의 국보위 상임위원회는 인천과 김포지역의 산단 조성계획을 확정하고, 수도권 문제 심의위원회에서 이를 의결했다. 포화상태에 이른 서울의 공장이 갈 데가 없자 인천 등지를 공장 이전을 촉진지역으로 묶었던 것이다.

 산단 조성 대상지 가운데 요지는 역시 인천시 남동 폐염전 자리였다. 서울서 30㎞, 인천항에서 7.2㎞, 게다가 경인고속도로로부터 6㎞로 최적의 위치라는 이점이 작용했다.

 정부는 1984년 4월 경제장관회의를 통해 토지개발공사(현재 LH)를 사업시행자로 결정했다. 남촌·도림·논현·고잔·동춘동 등지 남동염전이 소금 밭으로서의 생명을 완전히 잃은 것도 이때부터다.

 토개공은 1985년 2월 인천시로부터 공유수면 매립면허를 받았다. 총 1천700억 원을 투입해 280만9천497㎡의 매립지와 염전, 농지 등 총면적 956만5천536㎡에 이르는 산단 터 조성이 목적이었다.

   박정환 기자 hi21@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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