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에는 휴머니즘(인본주의)이 없다. 돈의 규모가 커질수록 그 정도는 더해진다. 어머니의 밑반찬 살 돈과 부동산 개발업자가, 기업가가 택지와 상품에 쏟아 붓는 돈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전자는 자식의 피와 살로 빨려 들어간다. 자식을 먹이면서 자본 회수를 생각하는 부모는 없다. 후자는 돈이 돈을 낳기 위한 ‘시드머니(종잣돈)’다. 시드머니에 휴머니즘은 끼어 들지 못한다. 돈을 축적하고 쌓은 돈을 계속 불려 나가는 것은 투자금의 미덕(美德)이다. 이 미덕은 현재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가장 큰 덕이다. 미덕은 아름답고 장한 덕행이다. 대부분의 가장(家長)들은 이 덕이 없어 죽을 때까지 여기 저기 치이며 박복한 삶을 산다.

 휴머니즘은 절대 신(神), 유일신 사상에서 벗어나 인간을 중심으로 인간다움을 추구하자는 15세기 유럽의 문예부흥운동이었다. 지금 시대에 대입하면 절대 신이 된 ‘돈’보다 인간성을 추구하자는 것쯤 되겠다. 엄격히 말하면 남아 있는 인간성은 버리지 말자, 남은 인간성은 지켜내자 하는 식의 탄식에 가깝다.

 동양의 인간성은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부끄러워 할 줄 알고 사양하며 배려하고 궁극적으로 옳고 그름을 아는 마음으로 대변된다. 한마디로 도덕성이다.

 높은 교환 차액과 수익률을 추구하는 돈의 속성은 푼돈을 만지다 생을 마감하는 서민들의 삶에 잔존하는 인간성과는 동떨어져 있다.

 그들은 우리네 푼돈을 갈고리로 긁어 거둘 뿐 인본주의 따위를 염두할 필요가 없다. 속도와 효율성, 실리주의와 결합된 유일신(돈) 아래 휴머니즘은 쪼그려 앉을 자리도 없다. 이 구조에서 휴머니즘을 거들먹거리는 순간 배척된다. 문제는 휴머니즘에 기반해 운영되는 비영리성 조직들이다.

 영리추구가 제1 목적인 기업과 달리 공익적 차원에서 설계된 이 조직들조차 기업화, 투자자화됐다는 것이다. 비영리 조직의 기업화는 설립 원칙에 위배되지만 생존과 존립을 위한다는 이유로 용인됐다.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된 이상 휴머니즘은 조직의 이념에서 스스로 지워야 한다. 휴머니즘의 탈을 벗고 영리 우선의 기업이라고 밝혀야 최소한 수오지심(羞惡之心)은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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