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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사연 인천문인협회 이사
어릴 적, 옛 어른들의 ‘아홉수를 잘 넘겨야 한다’던 푸념의 의미를 올 들어 깨달았다. 그 시절만 해도 59세를 넘기는 것이 쉽지 않아 환갑잔치는 동네의 큰 행사였다. 올해 아홉수를 맞는 나 역시 파란만장의 연속이었다.

 삼월 말 아파트 단지 도로를 주행 중 주차장에서 나오던 개인택시로부터 운전석과 뒷좌석 출입문을 들이받혀 문짝을 교체해야 하는 사고를 당했다. 초보운전자도 아닌 고령의 개인택시 기사는 처음엔 내 차를 발견하지 못했다며 머리를 긁적이더니 택시조합 보험사 직원이 온 후 돌연 자세를 바꿨다. 이 건물 주차장에서 나와 건너편 건물 주차장으로 가던 중 사거리에서 사고가 났으니 쌍방 교차로 사고라는 것이다. 내가 그런 사고를 냈다면 보험사 직원이 뭐라 속삭이든 내 과실 100%를 인정했을 텐데 그들은 70% 과실만을 주장하며 나보다 더 오래 입원까지 했다. 너무 황당해 보험사에 소송을 주문해 80%로 바뀌었지만 상대방의 100% 과실을 주장하며 2차 소송을 의뢰한 상태다.

 4개월 후엔 주차장에서 구두가 바퀴 거치대에 걸리며 낙상을 했다. 무릎 부분의 바지가 찢어지지 않고 멀쩡해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통증을 느껴 바지를 걷어 올리니 무릎에서 피가 흐른다. 가능하면 병·의원을 이용하지 않는 성격이라 집에서 치료를 해 상처가 마무리됐는데 1주일 후 종아리와 허벅지가 퉁퉁 부어 올랐다. 한겨울에도 감기에 걸릴 틈이 없이 일하느라 독감과 폐렴 예방주사는 생각해본 적도 없는데 의사인 아들 며느리는 나이 들어 면역성이 떨어졌으니 앞으로는 상처가 나면 즉시 병원을 찾아가란다. 무릎 관절부위라 걱정이 돼 큰 병원을 찾아갔더니 MRI(자기공명영상) 촬영 후 입원을 시킨다.

 1주일이면 퇴원할 줄 알았더니 열흘을 채우며 온종일 항생제 주사를 이었다. 입원 기간 동안 화장실조차 휠체어 바퀴를 돌리다 보니 팔꿈치 통증이 악화돼 지금도 활시위를 당길 수 없는 지경이 됐다. 게다가 가뭄에 농작물이 타죽지 않도록 매일 밭에 나가 지하수를 공급해야 하는데 꼼짝을 못하니 속이 터질 노릇이다. 입원 생활의 스트레스와 항생제가 화근이 되었는지 퇴원 무렵부터는 좌측 귀에서 윙윙 울리거나 찢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돌발성 난청이 왔다.

 퇴원하자마자 지팡이를 짚고 급한 밭일을 끝낸 후 8년 전 돌발성 난청으로 우측 귀를 치료했던 동네 이비인후과 의원을 찾았다. 담당 의사는 그나마 들을 수 있는 좌측 귀마저 악화되면 안 된다며 소견서를 써주면서 속히 큰 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다행히 그 대학병원엔 8년 전 내 귀를 치료했던 교수가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전에 돌발성 난청을 앓았던 우측 귀의 청력이 급격히 떨어진 증상이 심상치 않으니 뇌 MRI 촬영을 해야 한다고 했다. 예상대로 결과는 좋지 않았다. 얼마 전 주차장 바닥에 넘어진 사고도 우연이 아니고 지금의 증상과 연관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의 관심은 추후 우측 귀의 방사선 치료보다 좌측 귀마저 난청이 되지 않도록 속히 치료를 받아 사는 동안 청각장애를 면해야 한다는 간절한 바람뿐이었다.

 다행히 지금은 좌측 귀의 청력이 전처럼 회복됐다. 치료를 받던 당시의 심정은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원망과 체념, 그리고 불안과 초조의 일상이었다. 아내와 대화를 하거나 회의에 참석하려면 거추장스러운 증폭기를 귀에 끼워야 가능했다.

 그 순간, 이 세상에 시끄러운 소리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도 때도 없이 귓전에서 윙윙거리는 이명증의 각종 기계소음 말고 고막을 진동시키는 어떤 소리도 그립고 다정다감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얼마 전까지도 소음으로 여겨졌던, 아파트 창밖에서 들려왔던 아이들의 소란스러운 소리도 비록 증폭기를 통해서 들을 수 있었지만 그렇게 아름답고 반가울 수가 없었다. 이따금 창밖의 아이들을 향해 "시끄러워. 조용히 해!"라고 소리치는 아내에게 나는 난청 치료 시절을 떠올리며 이 세상에 시끄러운 소리는 없다고 빙그레 미소를 그린다. 청개구리가 제 어미의 묘가 빗물에 쓸려 내려간 후에야 평소 엄마의 간섭이 시끄러운 잔소리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듯 나는 투병생활 후에야 소리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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