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원시 팔달구 수원제일평생학교에서 만학도들이 한글수업을 받고 있다.
▲ 수원시 팔달구 수원제일평생학교에서 만학도들이 한글수업을 받고 있다.
"빨리 한글을 배워서 고마운 사람들에게 편지를 전해주고 싶어."

지난 5일 오후 2시 수원시 매교동 소재 제일평생학교 ‘소망반’ 교실. 20여 명의 할머니들이 책상에 앉아 ‘한글 수업’을 진행 중인 젊은 교사의 강의를 한마디도 놓치지 않기 위해 귀를 쫑끗 열고 경청했다.

칠판에는 시력이 좋지 않은 노인학생들을 위해 큼지막하게 쓴 한글이 적혀 있었다. 늦깎이 학생들은 칠판에 적힌 글을 따라 적으며 학구열을 뿜어내고 있었다. 수업 중간에 졸고 있는 사람을 깨워 주거나 학생들이 농담을 하는 모습들은 일반 학교의 수업과 비슷해 보였다.

이들은 어릴 때 집안 형편으로 한글을 배울 기회가 없어 평생 우리말을 읽지도 쓰지도 못한 ‘한(恨)’을 지닌 노인들이다. 지난 4월부터 한글을 배우고 있는 조경자(59)할머니는 10년 내로 대학에 입학하는 게 최종 목표다.

조 할머니는 "그동안 한글을 배우고자 여러 번 학교를 다녔지만 집안 사정으로 인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며 "한글을 열심히 배운 지금은 받아쓰기 시험에서 대부분 100점을 맞는다"고 기뻐했다. 이어 "진학을 위해 다른 과목도 배워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한글을 빨리 익혀 임신한 딸에게 손편지를 써 주고 싶다"고 희망을 전했다.

노인들의 학구열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평택에서 지하철로 1시간가량의 거리를 통학하는 김학인(70)할머니는 "다른 곳에서 한글을 배워 봤지만 만족스럽지 않아 이곳에 오게 됐다"며 "아파서 못 다닐 때까지는 계속 다닐 예정"이라고 말했다.

어릴 때는 가난 때문에, 결혼 이후에는 친정 식구들의 눈치 때문에 한글을 배우지 못했던 김 할머니가 뒤늦게 한글을 배우게 된 계기는 장사를 하는 아들을 도와주기 위함이다. 장사를 도우려면 한글을 알아야 해 급하게 한글을 배우게 됐다.

김 할머니는 "이전엔 은행 업무도 혼자 보질 못 했는데 이제는 문제 없다"며 "이곳 학교에서 SNS 메신저인 카카오톡 사용법을 배우는 동아리에 들어 자식들에게 문자를 넣어 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 할머니처럼 제일평생학교에서 ‘만학의 길’을 걷고 있는 노인은 총 200명에 달한다. 이 학교는 학업에 갈증을 느끼는 노인을 대상으로 성인문해교육과 학력 보완 검정고시, 학습동아리, 문화 및 교양 프로그램 등을 운영한다. 1963년 개교 이후 1996년 화재로 인해 소실된 기록을 제외하면 확인된 졸업생만 총 5천592명에 이른다. 지난달에도 48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노인들이 배우는 학교여도 일반 학교처럼 수학여행을 가거나 시화전에 참가하고 있으며, 나이 차이에 상관없이 학년마다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교내 학생들을 가르치는 자원봉사자도 50여 명에 달한다. 이곳에서 5년 동안 수업을 진행하고 있는 서관숙(51·여)교사는 "1천 시간 동안 자원봉사를 해 수원시에서 우수봉사자 상을 받았지만 아직 다른 교사들에 비하면 부족한 수준"이라며 "지금 가르치는 20명의 학생이 문제 없이 모두 졸업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박영도 교장은 "현재 여성노인들의 ‘까막눈’ 현상은 시대가 낳은 하나의 기형적인 문제"라며 "국가가 노인들의 교육을 제도적으로 권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글·사진=박종현 기자 qwg@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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