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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기 인천대 외래교수
현진건은 소설 ‘술 권하는 사회’를 통해 경제적으로 어렵고 정치적으로 암울했던 1920년대의 시대 상황을 제목 그대로 그려낸 바 있다. 이 작품은 당시에 자조적인 태도에 함몰돼 있던 지식인들의 무기력함을 설득력 있게 드러낸 빙허의 수작이다.

 지금 한국은 독설 권하는 사회로 치닫고 있다. 상대 진영에 대한 적대감으로 무장한 정치권에서는 독한 말이 난무하고 SNS에는 격한 막말이 빈번하며 인터넷 댓글에는 정부에 대한 비난과 이 비난에 대한 욕설과 야유가 빗발친다. 말은 자신에게 유용한 무기가 되기도 하지만 상대에게 치명적인 흉기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말에 베인 상처는 재발을 반복한다. 몸에 난 흉터 자국은 덮어버리면 그만이지만 말에 다친 마음은 그 흔적이 쉽게 가려지지 않기 때문이다. 말은 라틴어로 혀(舌)라는 뜻에서 유래했는데 이는 혀가 먹는 기능보다 말하는 기능이 우선이라는 점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윈스턴 처칠은 자신에게 "당신은 취했다. 그것도 구역질나게 취했다"고 거칠게 대드는 동료 여성 의원에게 "당신은 못생겼다. 더구나 구역질나게 못생겼다. 그런데 나는 아침에 잠에서 깨면 그만이지만 당신은 계속 추녀로 남을 것이다"라고 응수한 바 있다. 헛소리한다는 상대 여성의 말을 치명적인 독설로 맞받아친 것이다. 이는 유머 정치인으로 알려져 있는 그가 체면과 자존심 앞에서 막말로 무너진 일화다.

 미국 빌 클린턴 전 대통령에게 밥 도넌 하원의원이 퍼부었던 과거 독설도 인구에 회자될 만큼 원색적이고 자극적이다. 그래도 명색이 대통령인데 ‘허연 넓적다리와 여자들의 체취가 밴 조깅 반바지로 백악관의 품위를 훼손한 오입쟁이’라고 비난했다. 이에 질세라 클린턴도 그를 광견병약이 필요한 미친개라고 화답(?)했다. 역시 막말과 막말이 정면으로 충돌한 경우였다.

 한국 정치도 말의 품격을 잃은 지 이미 오래다. 분노·두려움·성취감 같은 감성적 자극이 셀수록 신경조직이 활발해져 기억력을 높인다는 점을 고려하면 한국 정치인들의 독설 또한 유권자와 표를 의식한 의도적인 정치전략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막말은 자기 과시의 효과적인 방식일 뿐만 아니라 자기 편을 결속시키기에 아주 효과적인 수단이다. 하지만 인격 수준이 말의 수준을 넘지 못하듯이 학벌이나 경력과 무관하게 정치인들의 인격 또한 자신들이 내뱉는 말의 수준을 앞서지 못한다. 얼마 전 야당 원내대표는 국회에서 ‘국민을 현혹하는 보이스피싱, 세금뺑소니, 문워킹, 굿판, 세금중독 적폐’ 등의 독설을 쏟아내면서 정부의 소득주도성장 정책을 비판했다. 여당 대표는 참여정부 총리 시절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특정 신문을 민족 반역지로 규정하기도 했다. 이 신문들은 식민지 치하에서 일제에 치열하게 저항했던 민족지들이었다. 이 신문사 가운데 한 신문사는 유신정권에 대항해 백지 신문을 발행했던 곳이기도 하다.

 이런 신문이 역사의 반역지로 내몰렸던 것이다. 게다가 최근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을 철이 아직 안든 사람이라고 비아냥대기도 했다. 아무리 국민적 공분을 불러일으킨 전직 대통령이더라도 연배로 봐서라도 부적절한 언사였다. 또한 보수의 궤멸을 주장하기도 했는데 자신의 염원대로 보수세력 없이 민주당 20년 장기 집권이 가능한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 말이 표독스럽기 이를 데 없다. 친박과 기자들에 대해서 각각 ‘나쁜 놈들’이라고 해서 구설수에 올랐던 김무성 새누리당 전 대표와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발언 역시 막말이기는 마찬가지다. 하긴 막말의 덫은 박근혜 전 대통령도 넘지 못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참 나쁜 대통령’이라고 했던 이 말도 두고두고 대통령의 막말로 역사에 남을 듯하다.

 자신에게 비우호적인 인사들에 대해서 ‘바퀴벌레, 고름, 암덩어리’라고 몰아치고 경찰에는 미친개는 몽둥이가 약이라거나 정권의 똥개라는 말까지 쏟아낸 홍준표 새누리당 전 대표의 말은 저급한 막말의 끝판을 보는 듯하다.

 「여씨춘추」에 나오는 ‘시대에 뒤떨어진 바보’라는 뜻의 각주구검(刻舟求劍)이라는 고사는 흘러간 옛 법만 가지고 다스리는 나라는 망하기 십상이라는 말이다. 춘추전국시대에는 학자나 사상가들이 이런 고사로 위정자들에게 경계를 요구했다. 독설에도 품위가 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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