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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채훈 삼국지리더십연구소 소장
지난주 11일 오후 제주 서귀포 인근 해상에서 국제 관함식이 있었다. 티브이 화면으로 일대 장관이었다. 염려했던(?) 일본 해상자위대의 욱일기는 펄럭이지 않았다. 한일 관계의 껄끄러운 모습이 사전에 잘 조율된 것인가? 이틀 전 2000년대 한일 관계의 황금기 초석을 놓은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파트너십 선언) 20돌을 맞아 도쿄에서 열린 기념 심포지엄에서 아베 총리는 "일·한 양국은 이웃 국가이기에 여러 어려운 과제가 있다. 파트너십 선언이 발표됐을 때 나는 젊은 의원은 정권에 압력을 가하는 쪽이었다"며 "하지만 이런 여론과 압력을 극복하고 최고 지도자들이 결단했기 때문에 양국 관계가 미래지향적으로 되었고 전진할 수 있었다"고 인사말에서 지적했다.

 얼핏 들으면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총리가 발표한 선언을 높이 평가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선언에서 오부치 총리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로 한국 국민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겨줬다는 역사적 사실을 받아들이며 사죄한다"고 했고, 우리 김 대통령은 일본이 "평화헌법 아래 전수방위 및 비핵 3원칙을 통해 국제사회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수행해온 역할"에 대해 찬사를 보냈었다.

 파트너십 선언의 두 축은 일본의 겸허한 역사 인식과 전후 일본의 부흥을 이끈 평화헌법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3년여 전의 ‘아베 담화’ 이후 일본은 더 이상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 사죄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고, 일본의 교전권과 군대 보유를 금지한 평화헌법 개정을 추진 중이다. 아베 총리는 자신의 정치적 목적이 헌법 개정에 있다고 공공연히 밝힌 바 있다. 결국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은 이미 무너진 셈이고 아베의 ‘미래지향적 관계를 만들자’는 말은 단순한 수사에 불과하다는 느낌만 주었다. 실상 지금 한일 관계 전망은 암울하다. 문재인 대통령은 최근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12·28 합의의 결과물인 ‘화해·치유재단’을 해산한다는 방침을 시사한 바 있고, 우리 대법원은 강제 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들을 상대로 낸 소송에 대해 조만간 판결을 내릴 것으로 주목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일본이 2차 북·미 정상회담 장소를 제공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올해 초부터 급변하고 있는 한반도 정세 변화의 흐름에서 소외될까 전전긍긍하던 차에 돌파구 마련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일본이 2차 북·미 정상회담 장소 유치를 통해 북·일 관계 개선을 도모하면 여러 가지 ‘좋은 성과’를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이 남·북·미 대화 국면에 동참하고 북한 관계를 개선하는 일은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 정착이라는 목표 달성에 긍정적인 요소다. 그러나 과거는 입 다문 채 2차 북·미 정상회담의 장소가 중립적 색채가 강한 제3국으로 유력해진 가운데 내놓은 제안으로 그 진정성은 별로 커 보이지 않는다. 북한은 당초 폼페이오 장관의 방북 당시 회담 장소로 평양을 제외했지만 미국 측이 큰 관심을 보이지 않은 것으로 보도되고 있고,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을 마러라고 리조트에 초대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김 위원장의 이동 일정 등을 감안할 때 부담스러운 시나리오라는 것이 중론이다. 따라서 스위스의 제네바와 스웨덴의 스톡홀름, 체코의 프라하, 노르웨이의 오슬로 등등이 유력 후보지로 검토되고 있다는 블룸버그 통신의 보도가 신빙성을 더하고 있는 판국이다. 제네바와 스톡홀름에는 북한 대표부와 대사관이 있어 회담 준비가 용이하고, 그동안 남·북·미가 참여가 반관반민(1.5트랙) 대화가 여러 차례 이루어진 바도 있다. 여기에 아시아에서 북한 및 미국과 각별한 외교관계를 수립한 몽골과 역시 북한 대사관이 있는 방콕 등이 거론되고 있다.

 일본의 회담 장소 유치를 부정적으로 볼 일은 아닐 것이다. 북·일이 논의 중인 납치 문제 해결이나 일제강점기 일본군 유해 발굴 및 송환 재개는 물론 일본의 대북제재 해제, 북한 경제 지원 등의 효과를 기대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아베의 빈약한 역사 인식과 전쟁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미래지향(?)의 정치적 목적에 일조할 수 있는 상황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분명한 경계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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