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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겸 시인
가을이다. 하늘은 높고 허공은 푸르게 빛난다. 순간, 가슴 깊이 숨어 있던 방랑기가 꿈틀거린다. 무작정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충동, 그리고 한 구절의 시구(詩句)가 뇌리 속에서 맴돈다. 그래서 가을은 사람들을 시인으로 만드는 것 같다. 나의 방랑기는 결국 멀리 가지 못하고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지월리에 있는 경기도 지정기념물 제90호인 허난설헌(許蘭雪軒) 묘소를 찾게 됐다. 갑자기 난설헌의 시 한 수가 떠오른다. "맑고 너른 가을 호수에 푸른 구슬이 빛나네/꽃으로 덮인 깊숙한 곳에 목란배를 매어두었네/임을 만나 물 건너로 연밥을 따서 던지고는/행여 누가 보았을까 한나절 혼자서 부끄러웠네."

 가을 호숫가 연꽃 우거진 곳에서 난초 잎 모양의 나무배를 타고 놀다가 우연히 그리운 임을 만난다. 물 건너편으로 연꽃잎을 따서 던져놓고는 혼자 부끄러워 한나절 내내 남몰래 걱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녀의 시에 드러나는 소녀의 순수한 설렘은 조선시대라는 무거운 장벽에 짓이겨진다. 그녀는 지적 정서적으로 교류하기 어려운 사람과 결혼하여 좌절과 고독의 시간을 보낸다. 게다가 시어머니와의 불화와 두 아이의 죽음은 결국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꿈꿀 수 있도록 글을 가르쳐 준 친정의 몰락과 함께 27세의 젊은 나이의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 난설헌은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의 누나이다. 강릉 초당 문장가의 가문에서 태어나 성장하면서 어릴 때부터 글과 시를 배웠으며 8세 때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을 지어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다.

 15세에 안동 김씨 가문의 김성립과 결혼하지만 원만하지 못했으며 자식들마저 모두 잃고 동생 허균마저 귀양을 가는 등 불행이 계속됐다. 그녀는 슬픔과 비극적 삶 속에서 독특한 자신만의 시세계를 만들었다. 죽기 전 작품을 모두 불태우라는 그녀의 유언에 의해 천여 수의 시편이 사라졌지만 그녀가 지은 한시 213수가 허균에 의해 정리돼 「난설헌집蘭雪軒集」에 전한다. 특히 많은 작품 중 일부가 중국과 일본에 전해져 요즘으로 말하면 베스트셀러가 됐으며 그녀의 시는 국제적으로 애송되기도 했다. 그녀가 살았던 시대는 ‘여자의 재주 없음은 오히려 덕’이 되며, 출가한 여인은 ‘남편이 닭이면 닭을 따르고, 남편이 개이면 개를 따른다’는 시대였다. 누구의 딸, 누구의 아내, 누구의 어머니로 불리며, 여성에게는 문학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한 시대에 그녀는 당당하게 호는 난설헌(蘭雪軒), 자는 경번(景樊), 초희(楚姬)라는 이름으로 살았다. 그녀의 시편들은 한시의 형식이지만 시어가 맑고 깨끗하며 문장이 빼어났으며 시의 주제는 서정의 표출 외에도 상황과 한계를 극복하려는 의욕, 낮은 벼슬아치와 시인의 곤궁함, 서민들의 고통과 가난한 이웃에 대한 연민, 시국에 대한 걱정 등 매우 다양하다. 그녀는 그 시대 여성 중 가장 많은 수의 시를 남겼으며, 한국문학사에서 여성 최초로 자신의 이름으로 된 전문시집을 갖게 된 시인이었다. 뿐만 아니라 중국의 「고금여사(古今女史)」에서는 이태백과도 견주기도 했다. 난설헌의 시들은 조선보다 중국에서 먼저 읽혀지고 출판 유행되었으며 이후, 조선에서는 유성룡, 홍대용, 김만중 등의 문장가들에게서 비판과 찬사를 동시에 받는 등 당시 문장가들의 입에 이름이 오르내리기도 했다.

 난설헌 묘소 왼편에는 두 아이를 잃고 쓴 시 ‘곡자(哭子)’를 새긴 비와 아기 묘 두 기가 있다. 우측 허난설헌 시비에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시, 몽유광상산시서(夢遊廣桑山詩序)가 새겨져 있다. 난설헌의 시는 국문학사에서 적정한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문학사에서 곧 제대로 다뤄질 것이라 기대한다. 난설헌 묘소에 서서 앞을 바라보니 중부고속도로가 내달리고 있다. 고즈넉해야 할 시인의 묘소치고는 너무 소음이 심하다. 그녀는 죽어서도 즐겁게 시를 쓸 것이 분명한데 주야로 치닫는 자동차의 소음이 그녀를 방해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경기도 땅에서 영면하고 있는 허난설헌, 보물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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