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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효성 국제펜클럽 인천지부 부회장
핑크뮬리가 몽환적인 핑크 톤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우유를 살짝 섞은 듯한 자주와 분홍색의 배합으로 경험하지 못했던 사랑스러운 색감을 보여준다. 핑크뮬리 인공 재배 단지는 인기 장소가 되어 나들이객의 발길을 유혹한다. 하늘공원의 억새 군락지에 조성된 핑크뮬리가 고혹적으로 예뻤다. 가을 대표 풍광으로 단풍과 억새를 꼽는데 핑크뮬리의 인기에 밀리는 쪽이 억새인 것 같다.

 핑크뮬리는 가을 산야의 주인공으로 억새가 누려왔던 난공불락의 자리를 단숨에 넘보는 외래종이다. 생태계 파괴와 혼란을 걱정하는 사람도 있지만 아직은 어떤 불상사를 초래할지 판단할 수 없다. 억새는 수더분하면서 애잔하다. 역광으로 찍힌 사진에는 세월을 지나온 은발이 기우는 햇살에 비쳐 숙연하게 빛나곤 한다.

 억새는 사위어 가는 늦가을 풍경에 빠질 수 없는 정서다. 노모의 건강이 좋지 않아 간병인이 필요했다. 노환으로 병석에 누운 노모는 회복이 더뎠고 간병인은 이런저런 이유로 바뀌었다. 새로 온 간병인은 나이대가 좀 높아 호감도가 낮았는데 지내보니 환자를 진심으로 간병해 고마웠다. 약 먹고 잠이 든 노모의 병상 옆에서 간병인의 고해를 들었다.

 살아생전에 하지 말아야 할 것 딱 하나가 죽는 것을 실험하는 것이라 했다. 약을 먹었다면 속을 다 버리게 되고 투신을 했다면 몸이 만신창이가 되니 죽는 연습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다고 했다. 삼일 만에 깨어난 몸이 온전할 리 없다며 내 몸에 평생 자해의 후유증을 남기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무모하고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강조를 했다. 사연 없는 세월이 어디 있으며 죽음을 생각했던 날의 기억이 나 혼자만이 아니다는 그 분의 고백에 숙연했다. 질긴 목숨이라고 했다. 그녀는 몇 번의 자살 시도로 생을 끝내고자 했으나 이 생에서의 역할이 남아 있어서인지 살아났다며 자신과의 약속을 지킬 것이라 했다.

 내가 나를 무시하면 남도 나를 무시하는데 어리석게도 자신을 존중하지 않았다며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 했다. 그녀는 질기고 모진 가족사 때문에 서러웠다 했다. 세월에 삭아서 희미해질 만큼의 시간이 흐르고 흘러간 것 같은데도 가슴속에 쌓인 상처를 되새김질하며 지냈다고 한다. 간병인으로 병자를 돌보면서 살고 있었지만 정작 자신의 내상을 돌보지 못해 오랜 세월 마음의 병과 동거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간병인 직업의 보람은 환자를 지극정성으로 수발해 환자가 건강해져 퇴원을 하는 것이라 했다. 어느 날, 간병하던 환자가 건강을 되찾아 가족들의 축하를 받으며 퇴원하는 모습을 배웅하고 돌아오는데, 문득 자신을 돌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다. 심리 상담 치료가 도움이 되었고 돌봐야 하는 식구와 돌봐야 하는 스스로를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났다 한다.

 밥 위에 모래를 뿌려 도시락을 싸주고 머리끄덩이 잡아채 피멍 들도록 때렸던 계모가 치매로 천진해지자 계모의 친자식들은 간병인인 여자에게 노인네를 떠넘기고 인사치레 말만 푸짐했다 한다. 치매 증상이 심해지면서 돈을 훔쳐갔다, 내 영감을 홀렸다, 황당한 말을 지어내 덤벼드는 계모도 한 많은 인생을 한탄하며 살다 반신불수가 된 친모의 대소변도 받아냈다. 사랑 한 줌 준 적 없는 새어머니도 자식을 안락하게 품어주지 못했던 생모도 생을 마감할 때까지 간병인 여자가 돌봤다 한다. 애증의 세월을 수용한 뒤에야 마음에 평화가 왔다고 했다.

 하늘공원 전망대에서 올려다 본 하늘에 붉은 노을이 퍼져 나가더니 차츰 어둠이 내려앉는다. 노을빛이 시나브로 사라진 하늘에 별이 돋아날 테지만 인공 불빛 때문에 별빛이 희미하다. 인공조명은 입력된 명령체계로 제 주위를 밝히고 강제된 빛이 불편한 삼라만상은 잠 속으로 휴식한다. 핑크뮬리의 밤이 낮처럼 고혹적이지 않은 틈새를 억새는 조급하게 피어나려고 애쓰지 않는다. 시간의 점 어느 때에 핑크뮬리와 억새가 같은 공간에 살아 멋진 가을 풍광을 연출할 줄이야. 연민조차 아름다운 시월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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