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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덕우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
월미도(月尾島)라는 명칭이 중앙 무대에서 거론된 첫 사례는 1655년(효종 6) 「승정원일기」에 월미행궁(行宮) 건립과 관련한 기사가 등장한 이후부터이다. 이때의 명칭은 ‘魚乙未島(어을미도)’였고 35년이 지난 숙종(1690년)때에는 ‘於乙未島, 於乙味島(어을미도)’였다. 그리고 오늘날의 월미도라는 명칭은 1708년(숙종 34)에 처음 나타나고 있다. 대략 18세기에 들어서 월미도라 표기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후 1834년 고산자 김정호는 「청구도」에서 이 섬의 이름을 월성(月城)이라 표기하기도 했다.

 결국 ‘월미’라는 명칭은 ‘어을미’에서 유래한다 하겠는데 ‘어(魚, 於)+을(乙)’은 우리말 ‘얼’을 한자로 풀어쓴 것이니, 결국 월미도의 원래 이름은 ‘얼미도’였던 셈이며, ‘얼’과 비슷한 발음에 ‘달(月)’이라는 좀 더 좋은 뜻을 가진 글자를 끌어와 붙인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땅 이름이 한자로 바뀌는 과정에서 본래의 의미와는 다르게 좋은 뜻의 글자를 갖다 붙이는 일은 무척 흔했기 때문이다.

 ‘얼’은 ‘얼다’와 같은 뿌리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얼음이)‘얼다’는 ‘섞이다’, ‘교합(交合)하다, ‘합쳐진다’는 뜻이다. 여기에 ‘미’는 ‘물(水)’을 의미하는 것이니 월미라는 명칭은 ‘물(미)이 섞이는(얼) 섬’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육지와 거의 맞닿은 곳에 있고, 바닷물이 이 섬을 타고 돌면서 섞이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갖게 됐을 것이다. 월미도는 더 이상 이름자 그대로 달(月)의 꼬리(尾)를 닮은 섬은 아니다.

 월미도가 한국의 역사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병자호란의 아픔을 겪은 뒤였다.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 가던 때의 상황을 보면, 피난 초기 서울을 빠져 나와 강화도로 향했으나 강화도로 진입하는 길목이 차단되자 부득이 남한산성을 택했고, 그 뒤에도 야음을 타서 강화도로 떠나려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인조는 삼전도에 나아가 청 태종 앞에서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라는 ‘3번 무릎 꿇고 9번 머리를 조아리는’ 굴욕을 당해야 했다.

 월미도의 행궁은 청국에 대한 북벌정책을 강력히 추진하던 효종대(1650∼59)의 문신 홍명하의 건의에 따라 효종 7년(1656) 당시 인천부사인 윤부에 의해 (비밀리에)건립됐다. 전시가 아닌 평상시에는 김포의 통진을 거쳐 강화부로 진입하는 데에 있어 별다른 문제가 없었지만 이미 그 통로가 적에게 노출된 상황에서 서울에서 강화에 이르는 새롭고 안전한 길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유사시에 갑곶진으로 가는 길이 막혀 뱃길이 통하지 않게 되면 인천부에서 영종진을 거쳐 강화 남쪽(초지진)에 도달해야 하므로 월미도에 행궁을 설치해 머무르는 곳으로 삼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월미도를 경유했던 것은 물때를 맞추기 위한 방책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행궁이란 임금이 궁궐 밖으로 행차할 때 임시로 머물던 별궁으로 이궁(離宮) 또는 행재소(行在所)라 불렸는데, 주로 능행이나 휴양시의 임시거처, 전란시의 피난처 등으로 이용하기 위해 지어졌다. 영조 때 제작된 「여지도서」에는월미도 행궁이 자좌오향(子坐午向:정남향)이며 옛 임해사(臨海寺) 터에 28칸의 (작은)규모로 건립되었는데 수직군(守直軍) 3명이 항상 대기토록 했고, 한 차례의 중수(重修)가 있었음을 전해주고 있다. 그러나 효종의 사후 그의 북벌계획이 지속적으로 수행될 수 없었고, 월미행궁 자체가 청(淸)의 침입에 대비했던 만큼 어느 시점에 폐쇄됐던 것으로 보인다.

 2000년대 초반 월미행궁의 위치 비정을 둘러싼 격론이 벌어졌다. 지금의 인천해사고등학교 자리와 일본군 석탄고 주변으로 보는 시각이 팽팽히 맞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쪽 모두에 대한 시굴조사 결과로서도 이렇다 할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현재까지 봉합된 상태에 있다. 그렇다고 해서 월미행궁의 역사적 의미까지 훼손된 것은 아니다. 월미행궁 터에 대한 재조명은 반드시 있어야 하고 나아가 인천-월미도-영종도-초지진으로 이어지는 해상관광도 고려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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