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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훈 겨레문화연구소 이사장
‘빨리빨리 문화’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급한 성격은 세계가 인정한다. 3분 라면과 같은 빠른 식사를 위한 인스턴트 식품들이 우리 식탁에 올라온 지 이미 오래고, 식당에서는 음식주문을 하자마자 빨리 안 준다고 재촉하기 일쑤다. 신호가 바뀌고 바로 출발하지 않으면 신경질적으로 경적을 울리거나,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기도 전에 닫힘 버튼을 반복해 누르는 사람들도 많다. 공연이나 경기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는 사람들, 열차나 비행기가 제 시간에 출발하지 않으면 참지 못하고 항의하는 승객들의 모습도 자주 볼 수 있다. 택배 업체들은 전국 당일 배송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영업하고 있고, 차분하면서 성대하게 치러져야 할 결혼식조차 30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직장에서는 맡겨진 일을 ‘빨리빨리’ 신속하게 처리하는 사람을 능력자로 평가한다.

 이렇게 ‘빨리빨리’라는 말은 이미 우리 일상에 관습처럼 자리하고 있고, ‘빨리빨리 문화’의 흐름은 우리 사회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불과 반세기 전의 농경사회가 급속히 공업화로 탈바꿈되면서 사회 전반에 자연스럽게 나타났을 것으로 추측된다. 짧은 기간에 비약적인 경제 발전과 민주화를 동시에 해낼 수 있던 배경이 국민들의 노력과 근검절약 정신이 가장 큰 원동력이지만 한편으로는 ‘빨리빨리 문화’의 힘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빨리빨리 문화’의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일상생활에서 수없이 겪고 있는 문제들은 차치하고라도 수많은 인명을 희생시킨 대형 안전 사고들이 대부분 ‘빨리빨리’가 원인이 된 경우가 많았다.

 얼마 전 강원도 봉평에 있는 이효석 문학관을 찾은 일이 있다. 이곳저곳 돌아보다가 이효석의 좌상(坐像) 뒤편에서 빨간 우체통을 발견했다. 전국 방방곡곡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었던 예전의 그 우체통이 아니라 ‘느린 우체통(SLOW POST)’이란 특이한 이름이 붙은 우체통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소중하고 그리운 사람에게 고마운 마음을 편지로 전하세요. 이 편지는 6개월 후 수신자에게 돌아갑니다"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느린 우체통은 우정사업본부가 운영하는 정식 우체통은 아니지만 시간에 쫓기고 ‘빨리빨리’에 익숙해진 현대인에게 느림과 기다림의 의미를 전해주는 특별한 우체통이다. 우체통이 있는 곳에서 무료로 제공되는 엽서에 사연을 적어 우체통에 넣으면 6개월이나 1년 뒤에 배달해 주기 때문에 오랜 시간이 지나 흐릿해진 추억을 되돌아볼 수 있어서 경험하지 못한 진한 감동을 전해 준다. 기다림의 즐거움과 마음의 여유를 더 많은 이에게 전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아름답다.

 갯벌과 염전이 있는 신안군 증도와 노란 유채꽃이 피는 계절이면 수많은 사람들이 찾는 완도군 청산도, 그리고 대봉감과 야생차 재배지로 유명한 하동군 악양면, 붕어찜과 민물 어죽까지 즐길 수 있고 예당저수지로 이름난 예산군 대흥면 등 우리나라 여러 곳에는 ‘슬로 시티’라는 슬로 시티 국제연맹의 인증 표식이 붙어 있다.

 1999년 이탈리아 중북부 한 작은 마을의 시장이 주민들에게 ‘느리게 살자’고 호소하면서 시작된 슬로 시티 운동은 이웃과 사회 전체의 건강과 전통, 문화, 자연 등의 가치를 보존하면서 빠름과 경쟁보다 여유로움 속에서 행복을 추구하자는 느림의 운동이다. 이탈리아에 본부를 두고 있는 슬로 시티 국제연맹에는 세계 여러 나라의 수많은 도시들이 가입돼 있고, 도시 간 네트워크는 물론 관광, 문화, 협력 등의 활발한 교류활동이 이뤄지고 있어서 많은 도시가 인증 신청을 할 정도로 호응이 크다고 한다. 왜 이런 현상이 세계 곳곳으로 확산되고 있을까?

 불교의 경전 중 하나인 화엄경에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씀이 나온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그 의미처럼 ‘빠름과 느림의 차이’도 결국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생각이다. 이번 주말에는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과 함께 ‘슬로 시티’를 찾아 잘 만들어진 둘레길을 걸으며 놀라운 계절의 변화 모습들을 만나보자. 그리고 맛난 토속 음식도 찾아 먹어보자. ‘느린 우체통(SLOW POST)’에 엽서를 써넣고 내년 이맘 때쯤에나 받아볼 수 있는 기다림의 즐거움과 마음의 여유를 누려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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