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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구 청운대학교 대학원장
달포 전 즈음, 충북 보은 대추축제에 다녀왔다. 몇 년째 그 축제를 방문하는 것은 보은 인근의 황금 들녘이 주는 넉넉함과 대추를 마음껏 시식(試食)해 볼 수 있다는 즐거움 때문만은 아니다. 대개 축제는 무대 위 광경을 구경하거나 난장(亂場)을 둘러보고 오게 마련인데, 이 축제는 참가자들을 능동 참여자로 변화시켜 준다.

 우리나라 축제는 성리학의 여파로 놀이하는 자와 놀이를 벌이는 자로 나뉘었다. 놀이하는 광대와 ‘아랫것들’은 질펀하게 놀이를 벌이고 양반들은 뒷짐지고 남의 어깨너머로 슬며시 구경하는 자였다. 이러한 문화가 지속돼 오다가 지방자치 실시 이후 각 지역마다 축제가 성행하고, 노는 자와 구경하는 자가 어설프게 손을 잡으려 하고 있다.

 네덜란드의 인류학자 요한 호이징하는 「호모 루덴스」에서 인간을 놀이하는 존재로 정의했고, 하비 콕스는 「바보들의 축제」에서 인간을 축제하는 인간으로 발전, 재해석하고 있다. 원래 축제의 기원은 함께 너와 내가 하나가 되어 난장을 즐기는 것이다. 16세기 네덜란드 민속 화가 피터르 브뤼헐은 ‘사육제와 사순절의 싸움’이라는 그림에서 ‘카니발(carnival)’의 모습을 리얼하게 그려내고 있다.

 기독교 문화권에서 축제를 ‘카니발’이라 했던 것은 경건한 사순절이 시작되기 전, 신성한 기간을 견디기 힘든 인간들이 잠시 동안 함께 먹고 마셨던 행위에서 기원됐기 때문이다. 카니발에 참여한 사람들은 신 앞에서 신분의 차별, 지위고하를 잠시 내려놓고 너와 내가 하나가 됐다.

 축제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심리에는 구경꾼의 자리 외에도 ‘일상으로부터의 일탈’이라는 의미도 내재해 있다. 평범한 인간들의 일상은 팍팍하고 힘들고 곤궁하다. 특히 서양 중세나 조선시대 하층계급의 삶은 더욱 그랬다. 소위 탈춤도 양반들의 가식을, 탈을 쓰고 아랫것들이 잠시 동안 불만을 쏟아 내게 한 장치였다. 구경하는 양반들에게 우리의 힘든 사정을 역지사지(易地思之)해 보자고 해학(諧謔)으로 ‘승화(sublimation)’하고자 했다.

 축제라는 문화 속에는 인간들의 독특한 애환이 녹아 있다. 중국의 토가족들은 결혼하기 전에 한 달 내내 우는 습관이 있었다. 얼굴을 추하게 만들어 결혼 전에 토사왕과 동침이라는 관계를 깨보려는 아픔이 담겨 있다. 축제는 아니지만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1786)도 그 시대의 아픔과 슬픔을 신랄한 풍자와 위트로 보여주는 오페라 부파(buffa)다. 여기서도 소위 ‘초야권 Le droit de cuissage (初夜權)’이 이슈로 등장한다. ‘뀌사즈’는 허벅지라는 뜻이니 초야권은 ‘허벅지를 차지할 권리’라는 의미다. 귀족이라는 이유로 나의 아내를 먼저 차지해서는 안 된다는 항거라 할 수 있다.

 축제는 그 나름대로의 민속적, 인류학적 특성과 결합돼 변화하는 시대와 부합될 때 생명력이 유지된다. 일상의 고루함 가운데 잠시 동안의 일탈, 축제에 참가하고 났을 때의 일체감, 시원함, 인류학자 빅터 터너가 축제의 특징으로 말하는 ‘리미날리티 liminality’(평소에 못하던 것을 해보게 하는 것)와 ‘코뮤니타스 communitas’(자유를 만끽해보고 너와 내가 평등한 하나가 되는 것)가 축제에는 함의돼 있어야 한다. 2002년 월드컵이 끝나고 그 자리를 깨끗이 청소했던 것도 코뮤니타스의 한 예다.

 우리나라 1천300여 개의 축제 중 몇 개의 축제를 제외하고는 ‘그 축제가 그 축제’, 그저 ‘특별한 장날’일 뿐이라는 비판을 받는 이유는 축제에 돈을 지원하는 평가의 잣대가 전국적으로 동일한 원인도 있지 않을까?

 진정한 축제를 위해서는 지역의 경제파급효과, 관광효과를 축제의 성공 요인으로 내세울 것이 아니라, 지역 주민들이 먼저 머리를 맞대고 소통, 궁리해야 한다. 축제는 돈이 아니라 지역 커뮤니티의 ‘대화’에서 시작된다고 미하일 바흐친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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