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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옥엽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2018년 11월 25일 해양경찰청이 인천으로 환원된다. 인천은 1600여 년 전 고대 중국으로 가는 뱃길 능허대로부터 1883년 제물포 개항을 거쳐 오늘날 송도 신항에 이르기까지 해상교류와 해양주권 수호의 거점이었다. 1953년 부산에서 창설된 해경이 1979년 인천 북성동으로 신축 이전하게 된 것도 국가 안보의 요충지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근대 개항을 전후한 시기 조선은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요호사건 등 외세의 침략으로 서양 전함의 위력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에 신식 배를 만들기 위해 무던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자본과 기술 미비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고종은 우선적으로 해군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게 되는데 영국총영사에게 해군 교관 파견을 요청하고 이어 1893년 강화읍 갑곶리에 한국 최초의 해군사관학교를 설립했다. 15세 이상 20세 이하의 생도 50명과 수병 300여 명을 모집해 개교했는데 이것이 바로 통제영학당(조선수사해방학당)이다. 그러나 해군력 증강을 우려하는 일본의 압박으로 인해, 결국 다음 해 청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사실상 유명무실한 교육기관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근대식 해군을 창설하려는 고종 황제의 염원은 해군사관학교가 폐쇄된 지 8년 만인 1903년 4월 자주국방을 실현하기 위해 군함을 확보하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나라 군함의 효시라 일컫는 양무호(揚武號)이다. 고종은 이 군함의 이름을 ‘나라의 힘을 키운다’는 뜻에서 양무호라 명명했다.

 양무호 구입액은 국방 예산의 30%에 달하는 거금이었는데 하지만 막상 군함이랍시고 배를 들여 놓았지만 이를 운용할 만한 인력이 부족했다. 양무호의 초대함장은 박영효의 추천으로 관비 일본 유학생으로 선발, 동경상선학교에서 근대식 항해 교육을 받았던 신순성이 맡았으나 배가 워낙 낡은 데다 당초 일본이 운항 기술을 전수해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아 많은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구입대금을 지불하지 못해 4개월여 동안 인천항에 억류되기도 하고 러일전쟁 당시에는 강제 징발 당하는 수모도 겪게 됐다.

 양무호 문제가 비등해져 가는 가운데 우리 정부는 새로운 군함 발주 계획에 의거해 일본 고베조선소(神戶造船所)에 1천t급 광제호를 주문해 해관의 관세 수입자금으로 건조코자 했다. 광제호는 1904년 시운전을 거쳐 12월 20일 대한제국 정부에 인도됐는데 광제호가 인천항에 도착하자 3인치 포 3문을 장착해 해안 경비함, 등대 순시선 및 세관 감시선 등 다목적으로 사용했다. 당시 최신의 조선 기술로 제작되고 또 무선 전신시설이 설치된 우리나라 최초의 군함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05년 을사늑약에 따라 외교 군사권을 일본에 빼앗기고 보호국으로 전락함에 따라, 더 이상 조선의 ‘군함’은 필요 없게 돼 버렸다. 1910년 한일합병 이후 공식적으로 총독부 관용선이 됐고 그 이름마저 광제호가 아니라 일본식 ‘광제환(光濟丸)으로 바뀌고 말았다.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석탄운송선으로 전락했다가 광복을 계기로 일본으로 철수해 우리 역사 속에서 영영 사라지게 됐다.

 1945년 11월 11일 11시 서울 관훈동 표훈전에서는 해방병단(海防兵團) 결단식을 가졌는데 이날이 현대 우리나라 해군의 시작으로 해군의날이라는 뜻깊은 의미가 있다. 초대 해군참모총장이자 후일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했던 손원일 제독은 해군 창설 날짜를 선비 사(士)자 두 자가 겹쳐지는 날인 11(十一)월 11(十一)일로 선정했다. 평소 ‘해군은 신사도(紳士道)로 운영돼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진해에 해군사관학교가 태동되는데 사실 최초의 해군사관학교는 그 이전에 이미 인천에서 설립됐던 것이다.

 11월 25일 해양경찰청의 귀환은 그동안 해양 주권을 수호해 왔던 인천의 역사적 역할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고 인천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기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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