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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겸 (시인, 경기시인협회 이사)
수원의 명산 팔달산은 언제 보아도 편안하고 평화롭다. 수원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으며 화성 성곽과 공원이 연계된 트레킹 코스는 많은 시민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산자락마다 마련된 작은 운동장에서는 아이들의 밝고 해맑은 웃음소리가 끊임없이 쏟아져 나온다. 학습과 노동이 양립된 산업화 시대에 초등교육을 받은 우리로서는 상상조차 못할 일이다. 불과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자유학습의 날’이라는 미명하에 초등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아동노동이 자행됐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60~70년대에 초등학교를 다닌 학생들이면 대개가 실과라는 수업시간에 강요 아닌 강제 노동을 경험한 일이 있으리라. 농촌에서 학교를 다닌 어린 학생들은 고사리 같은 손으로 모내기에 동원됐고 녹색혁명과 산림 녹화를 위해 퇴비증산, 식목행사, 싸리 씨 채취, 송충이 잡기, 그리고 솔방울과 관솔 줍기, 벼이삭과 보리이삭 줍기에 동원된 이들, 학교 주변과 교실 및 화장실 청소, 화단 가꾸기 등 학교 미화 작업은 물론 농사체험을 위한 실습포 관리 등 온갖 허드렛일은 어린 학생들 몫이었다.

 비단 이것뿐이었겠는가. 새마을 도로 확장 사업과 학교 신축 공사장 등 강제 노동에 내몰렸으며 바닷가에 살던 나 역시 굴 양식장 조성에 동원돼 굴씨를 앉히기 위한 돌을 나르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지금의 아이들은 이해를 못하는 일이지만 그 시절에는 그것이 세상의 이치라 생각하며 아무 불평 없이 선생님의 지시에 따른 것이다.

 팔달산 효원약수터 인근에는 어린 나이에 노동 현장으로 동원됐던 그런 아픔이 숨어 있다. 그곳의 공원 매점과 화장실 사이에 좁은 길이 있는데 내려가면서 오른쪽에는 풀숲에 가려진 조그만 검은 대리석의 합동위령비가 있다. 그리고 비문에는 "수원파장초등학교 미화 활동을 위해 고이 잠든 아홉 어린이의 고귀한 넋을 이에 위로하니 부처님의 자비하심을 비노라." 그리고 뒷면에는 희생된 아홉 명의 이름과 "1973.9.22. 수원 파장국민학교장" 이라 적혀 있다. 아울러 45주기 추모제를 지내 줬던 파장초등학교 37회 동창회 일동이 내건 추모 현수막에는 "잊어버려서는 안 될 가을 1973년 9월 22일, 잊지 말아야 할 별이 된 친구들의 넋을 기리며…" 라는 문구만이 위령비를 쓸쓸히 지키고 있었다. 1973년 9월 22일, 파장초등학교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날은 자유학습의 날이었다. 선생님의 학습 계획서에는 각 학급마다 태권도 실습, 오락회, 글짓기대회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정작 4~6학년 학생들은 점심시간이 임박한 오전 11시 무렵 운동장 미화 작업에 동원됐다. 평탄 정리 작업 중 모자라는 흙을 마련하기 위해 학교 뒤 언덕에서 굴토 작업을 했는데 갑자기 흙이 무너지면서 9명이 매몰돼 목숨을 잃었으며 12명은 중상을 입는 사건이었다. 현장에는 지도교사도 없었고 괭이를 제대로 잡지 못하는 어린 학생들에게 성인이나 할 수 있는 굴토 작업을 시킨 교사들이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아침에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라며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섰던 아이들을 싸늘한 주검으로 만난 학부모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어디 소풍을 가다가 변고를 당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수학여행을 가다가 사고를 당한 것도 아니다. 못사는 자신들보다는 좀 더 나은 삶을 보전하기 위해 어려운 환경에도 학교에 보냈는데 연필을 잡고 있어야 할 손에는 괭이자루를 잡고 있다니 참담하고 정말 기가 막힐 일이었다.

 그럼에도 학부모들은 그 어린 학생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부강한 나라의 초석이 될 것으로 믿고 모든 것을 용서해 주었다. 그런데 산업화 과정에서 희생된 그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합동위령비는 접근하기조차 어렵게 계단조차 없다. 몇 년 전에는 자연 발생으로 만들어진 계단이 있었는데 어떤 연유에서인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우리나라는 세계 10대 경제대국의 반열에 올라섰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산업화 과정에서 우리 선배님들의 각고의 희생과 피나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경제대국 대한민국에서 그들에게 정당한 보상은 안 해주더라도 그들의 고귀한 희생은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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